청계산 수필

교수는 쩨쩨해

송담(松潭) 2022. 10. 20. 14:42

교수는 쩨쩨해

 

 

재경향우회가 발족되었으나 인원도 적은데다가 회칙도 정비되지 못하고 사업도 계획되지 못한 형편이다. 향우회의 목적은 고향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첫째요 향우끼리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둘째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와 있는 향우는 수백 명이나 된단다. 우선 160명에게 발기총회의 안내장을 발송하였으나 모인 것은 20명도 안 된다. 면장을 비롯하여 고향에서 온 사람들이 재경향우들보다 많았기에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출석한 사람들 중에는 사업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럭저럭 지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세 사람의 교수가 출석하였으나 마지못해 나온 눈치이고 직책도 서로 맡지 않으려 한다. 직책을 맡다 보면 고향을 돕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하니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회비를 적립하는 것이 고작일 터이니 어느 세월에 사업을 추진할 만한 기금이 마련될 수 있으랴. 최 선생과 더불어 특지가가 없을까 의논하면서 김○○ 교수는 형편이 어떠한지 묻게 되었다. 그러자 최 선생은 주저하지 않고 ‘교수는 쩨쩨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교수는 돈이 있어도 내놓지 못하는 졸장부라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뜨끔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김 교수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고 나에게 해당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35~36년 전 석사학위과정을 마치고 모교에서 조교생활을 할 때 하숙집 여주인에게 들었던 말이 역력히 떠올랐다.

 

나의 조교생활은 무보수였다. 본디는 대학교수 보수규정에 규정된 호봉에 따라 보수를 받아야 하지만 모든 조교가 '월 수당 X,000 원을 급함'이라는 발령장을 받고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는 석사학위 소지자도 매우 드물어서 조교로 근무하면서 강의를 맡다가 전임강사로 임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하여 조교만 되어도 외부에서는 마치 교수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인정되는 수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교수의 직제도 모르고 조교와 조교수를 혼동하기도 하였다.

 

조교가 되던 첫해에 월 수당을 받아서 겨우 하숙비밖에는 충당할 수가 없었다. 책을 사기는 고사하고 신문을 구독할 여유도 없고 배가 고파도 요기할 여유가 없었다.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수업을 해 보았지만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나는 아침저녁 식사를 거의 빠짐없이 하숙집에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휴일의 점심식사도 꼬박꼬박 하숙집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돌아다니며 점심을 사 먹거나 차를 마신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여유가 없었다. 체면치레로 양복만 단정히 입었을 뿐, 정말로 알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점심으로 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고 책을 보고 있는데 주인 마담과 그 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마담은 거리낌 없이 이 말 저 말 하다가 "대학 선생도 쩨쩨해!"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간호대학을 다니던 그 딸이 “들어!" 하고 놀라는 듯 싶더니 뒤이어 "들으면 대수야?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뭐.”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의 하숙방은 안채의 안방과 가까운 곁방인데 평소에도 항상 그들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지만 그날은 유심히 나의 귀청을 쨍쨍 울려 주었다. 아침저녁은 그렇다 치고 휴일의 점심도 빼놓지 않고 국수 한 갈퀴를 얻어먹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나를 얼마나 업신여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주인 마담의 말을 조금도 부정할 용기가 없었다.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신세 자탄밖에는.

 

그런데 오늘 최 선생이 말한 한마디는 쩨쩨하기 그지없었던 나의 젊은 시절을 다시 회상하게 하는 동시에 70을 바라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쩨쩨하기만 한 나의 모습을 그대로 지적해 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최 선생과 나는 수년 전부터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한 주일이 멀다하고 자주 만나고 때로는 대폿잔도 주고받으며 허물없이 지내고 있는 처지이다. 그의 부드럽고, 조용하고, 소박하고, 근검한 성품은 남에게 호감을 주고 더구나 직장에서 정년으로 퇴임하기까지 가산(家産)을 이루고 훈장까지 받았으니 그의 성실성은 능히 짐작할 만하다. 그와 나는 결코 값비싼 식당에 가서 격식을 차리고 음식을 대접하거나 대접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아무 곳에서나 '선술'을 마셔도 흉이 되지 않을 처지로 생각하고 서로 그렇게 사귀어 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재산(부동산)이 많은 사람이라고 평가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실생활에서 마음 놓고 소비생활을 즐길만한 형편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내가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여유도 있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학교수를 30년이나 하였고 봉급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처가 중·고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근무하였으니 저축도 많이 하고 퇴직금도 많을 것으로 짐작할 것이다. 그러니 자기보다 훨씬 형편이 나은 사람이 자기보다 조금도 못하지않게 '노랑이'로 행세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약간의 여유를 전원택지에 투자한 형편이고, 연금은 생활비로 써야 한다. 그동안 두 아이의 대학원교육비를 부담하고 나의 해외여행(연수)과 해외학술회의 참가와 저서발간 등으로 지출이 많다 보니 궁색을 면키 어려운 형편이다. 앞으로도 큰아이의 학비와 나의 저서 출판비에 작은딸 혼례비만 하여도 매우 힘겨운 처지이다. 그런데 최 선생은 내가 힘겹다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엄살이라고 윽박지른다. 자기가 엄살을 떠니까 나도 엄살을 떤다고도 한다. 최 선생은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하여도 별로 서운할 것이 없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난 이00이라는 친구가 나의 한 달 봉급이 1천만 원이나 되는 것으로 짐작하는 것처럼 세상에서는 교수봉급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 모양이다. 시중 은행의 새파란 지점장이 6~7백만 원씩이나 되는데 환갑이 지난 교수가 1천만 원쯤은 받지 않겠느냔다.

 

내가 알기로는 교수처럼 실속 없는 직업도 드물 것 같다. 고등학교(사범학교)를 나와 평생 교직에 봉사한 사람이나 박사학위를 가지고 평생 교직에 봉사한 사람이나 봉급이 거의 비슷할 뿐만 아니라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체 또는 회사의 직원들에게 생기는 잡수입(?)은 교수에게 없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도서구입비와 연구비로 많은 돈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더러는 연구용역을 맡아 다소의 잡수입을 얻는 교수들도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그러니 교수가 '쩨쩨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1999. 11. 29)

 

지교헌 / ‘방황과 고뇌의 세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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