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사범학교 입학시험

송담(松潭) 2022. 10. 25. 11:05

사범학교 입학시험

 

 

 

사진출처 :  청주교육대학교(구글이미지)

 

 

나는 1947년 9월 3일, 6년제 청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형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일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온 집안의 경사이기도 하였다. 내가 사범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어떤 사람은 '벼슬'하였다고 나를 칭찬해 주었다. 당시 내가 살던 새마을(화하리 신촌)은 방죽마을을 합하여 약 50호의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사범학교에 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범학교는 다른 중학교에 앞서 특차로 신입생 선발시험을 실시하였고 국민학교에서 특별히 우수한 학생들이 아니면 합격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마을에는 청주상업중학교와 농업중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청주사범학교에는 최재룡과 내가 처음으로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략...)

 

나는 농업중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어머니를 따라 내덕동(밤고개)방민옥 씨 댁에 쌀을 가지고 가서 자면서 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사범학교에 합격하였으니 농업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 말고 사범학교의 합격통지서를 찾아가라는 담임 선생님의 전갈이 왔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왕복 10km를 걸어서 뒤늦게 합격통지서를 찾아 왔다. 한 사람도 합격하지 못한 것으로 짐작하였으나 알고 보니 최재룡과 함께 합격한 것이었다. 제1회 졸업생 중에도 아무도 사범학교 합격자가 없었는데 제2회 졸업생 18명 가운데서 갑자기 두 사람이나 합격하였기 때문에 김학규 담임 선생님도 매우 기뻐하였다.

 

사범학교 입학시험은 석교동에 사는 이모님 댁에서 자면서 치르게 되었다. 나는 이때 평생 처음으로 도배 반자와 장판으로 단장된 깨끗한 방에서 전깃불을 바라보며 신기한 문화생활을 체험하게 되었다.

 

(...생략...)

 

6년제 사범학교의 학생이 되어 평생 처음으로 새 양복,새 구두, 새 모자에 새 가방을 들고 새로운 학생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입생들에게 일제히 지급된 양복이나 모자나 가방이 모두 새로운 것이었고 특히 까만 새 구두를 신고 청주 시내의 본정통(일제가 붙여놓은 이름)을 누비고 다니는 기분은 매우 좋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따금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구두에 바르고 헝겊으로 문질러서 광택을 내기도 하였다.

 

사범학교는 일제 때에 설립되어 장학금을 상당히 지급하고 요라고 부르는 기숙사도 있어서 학생들은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이 많이 모여들었고 사범학교 학생이라면 일단 특별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장학금도 거의 없고 수업료(기성회비?)도 학교에 납부하였으며 중등학교가 많이 신설되어서인지 사범학교에 대한 종전의 인식은 점점 희석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일단 특차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사범학교에 합격하자마자 집에서는 서둘러 입학금을 준비하였다. 현금이라고는 거의 없는 형편이라 황송아지 한 마리와 호밀 두 가마니를 처분한 것으로 기억된다. 집에서는 벼 외에 참밀 · 호밀 · 보리 · 조 · 콩 따위를 농사하고 암소가 매년 1마리씩 송아지를 낳았기 때문에 송아지와 곡식은 교육비를 충당하는 절대적인 재원이었다.

 

그런데 사범학교를 다니는 데는 초등학교에 비하여 학비도 훨씬 많이 들지만 무엇보다도 통학하는 것이 문제였다. 석성국민학교는 집에서 겨우 1.5k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고 길도 좋아서 통학에 문제가 없었지만 청주사범학교는 팔결(오근장) 쪽으로 30리 이상이나 되고 내수 쪽으로 40리 이상이나 되기 때문에 팔결로 걸어서 통학하기도 어렵고 내수로 기차 통학을 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14살(만 나이) 먹은 내가 집에서 통학하기는 도저히 어렵기 때문에 청주 시내에 방을 하나 얻어서 밥을 끓여 주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내덕동 연초제조창 뒤편(집 너머)에 방을 한 칸 얻었는데 여기서 사범학교까지는 5km가 넘는 거리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학교와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도 좋았을 터인데 구태여 학교에서 먼 내덕동을 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첫째는 고향(화)에서 가깝기 때문에 쌀을 가져오기가 편리하고 또한 인근(내덕동, 안덕벌)에는 김 씨네 형제와 최 씨네 형제가 있어서 의지가 되었던 까닭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은 우암산 기슭인지라 땔감을 구하기도 쉬워서 다행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이따금 오셔서 땔감을 마련해 주시고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갖은 정성을 다하였다. 나는 그저 철없이 가방을 들고 학교만 다닐 뿐이었다.

 

(2000. 2. 6)

 

지교헌 / ‘방황과 고뇌의 세월, 나의 참회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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