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그 어느 날의 통곡 (1)

송담(松潭) 2024. 6. 23. 20:55

그 어느 날의 통곡 (1)

 

 

 

나는 이따금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온 셈이지만 나도 그들처럼 통곡하면서 똑 같은 심정을 경험하였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나에게는 우연하게 통곡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도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 같고 전혀 예기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만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보게 되는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였던 것이 떠오른다.

 

나는 C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조교생활을 하다가 강의를 한 과목 맡게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너무 궁핍한 형편이었다. 당시의 대학조교는 교육부에서 규정한 ‘보수규정’을 적용하지 않고 ‘무보수’로 발령하면서 ‘월수당’을 적당히 지급하였는데 그 수당이 대학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초·중고 교사의 반의 반도 안 되어 세금을 공제하고 난 금액으로 하숙비를 지불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조교이고 강의까지 맡고 있으니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수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마침내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같은 재단의 중·고등학교에 전임으로 근무하면서 대학에는 시간강사로 출강하게 되었고 오직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기를 막연히 기대하고 있던 중에 같은 시내에 있는 국립초급대학 전임강사로 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하다가 같은 재단의 중학교에서 무자격영어교사로 근무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닐 것 같다. 전공이 다르고 자격증도 없는 나에게 영어교사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발령된 것은 일시적인 편법이었다. 재단산하 고등학교에 사회과 자리가 나기만 하면 즉시 자리를 옮긴다는 조건이었지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6-7명이나 되는 영어교사들은 대부분이 영어영문학과 출신이고 경력도 많아서 나와는 차이가 심한 위치에 있었다. 나의 영어실력이라고는 대학에서 영어원서강독을 맡아 강의하고 매주 출강하는 외국인 신부와 만나 시사잡지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것과 수년 동안 매주 영어교사들이 양관에 모이는 “TUESDAY EVENING ENGLISH BIBLE CLASS”에 참가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얼핏 보아 중학교영어쯤은 맡을만한 실력이 갖추어진 것도 같지만 나는 전공자들에 견주기는 어려운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영어교사를 사양하였지만 “주변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니 염려 말고 잠시 가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산하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사회과를 맡고 계속하여 대학에도 출강하고 있다가 우연하게도 국립교육대학에 재직 중인 선배님을 만나게 되고 마침 사회과 교수를 초빙 중에 있으니 한 번 이력서를 제출해 보라는 권고를 받게 되었고 뒤이어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자리를 옮긴 후에도 계속하여 모교에 출강하고 다시 모교의 전임으로 임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후배로부터 갑자기 전화를 받게 되었다. 나의 지도교수님이었던 L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너무나 놀라서 다시 묻고 또 물었으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건강하게 공중목욕탕에 다녀오셔서 오수(午睡)에 들었다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숨을 가두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강의를 마치고나서 서둘러 L교수님의 사택으로 달려갔다. 집에 들러 적당한 복장으로 갈아입지도 못하고 달려갔으니 거북하기도 하였지만 그대로 묵념을 올리고 사모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사흘 후에는 서울의 S공원묘지로 가서 장례절차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아도 비좁고 가파른 묘지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상주측과 묘지관리인의 사이에 거친 말이 오가다가 좀 더 넓고 평평한 다른 곳으로 옮겨 겨우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학의 원로교수로 중요한 자리에 계셨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그 누구보다도 청렴결백하고 군자다운 모습을 보이시던 나의 은사님이요 지도교수님이 하나의 작은 흙무덤 속에 묻히신 것이다.

교수님은 내가 서울에서 일본어교재를 구하였을 때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하시고 “혼자 공부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부지런히 읽고 석사학위논문도 서둘러 진행하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듬 해 전교의 석사학위과정재학생 가운데서 나만 홀로 논문을 완성하고 졸업식 날엔 나 홀로 석사학위가운을 입고 식장의 맨 앞에 앉아서 학위를 받고 다시 몇 개월 후에는 조교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비록 직책은 조교지만 원서강독을 맡은 나는 얼핏 보아 전임교수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당시 나의 전공 석사과정 입시에는 5명이 지원하였으나 2명만이 합격하여 과정을 수료하였으나 한 사람은 원거리 직장관계로 논문이 지연되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내 일생을 통하여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은인을 꼽으라면 지금 바로 흙속에 묻히신 교수님을 맨 먼저 꼽을만한 심정이었다. 무덤은 너무나 초라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보였다. 나는 도무지 은사님의 곁을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영원히 서서 바라보며 말씀을 듣고 싶었다. 나는 드디어 눈물이 나기 시작하고 가슴 속에서 통곡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또 울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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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날의 통곡 (2)

 

 

 

내가 전임으로 옮겨 간 대학은 국립교육대학이었다. 그런데 총장을 비롯한 교수들은 거의 모두가 국립S대 출신이고 기타 대학출신은 몇몇에 지나지 않았으나 석사학위소지자는 나를 포함하여 단지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나 2~3년이 지나고 나니 교수들의 학위취득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분위기는 매우 달라지게 되었다.

 

나는 형편에 따라 직장은 옮겼지만 C대학에 계속하여 출강하고 기회를 보아 전임으로 가기를 바라는 처지였고 교육대학의 사회과에 소속되어 다른 전공교수들과 긴밀히 사귈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착실한 강의준비와 연구논문쓰기에 집중할 뿐이었다. 따라서 동료교수 사이에서도 특별히 친밀하고 아기자기한 재미는 생각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하루는 뜻밖에도 교육학을 전공하는 C교수가 퇴근길에 대폿집이나 한번 들르자고 제안해 왔다. 뜻밖이기도 하고 술을 좋아하는 나는 사양하지 않고 도보로 산책하면서 현장에 가 보니 그런대로 술 한 잔 나누기에 적합한 간이식당이었다. 그는 일류국립대학출신이고 직장의 교수가 거의 모두 동창 선후배인지라 나의 생활 배경과는 차이가 현격하였고, 서로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 나타나는 음주실력도 만만치 않게 보였다. 다만 그는 석사학위를 취득하지 않고 연구실적도 대단치 않은데다 내가 웬만큼 갖추고 있는 독일어와 중국어에는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슬금슬금 들여다보며 우정을 확인하는 기분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나와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술잔을 나누게 되고 다른 교수들과도 어울릴 기회가 잦게 되었다. 그는 허울 좋은 도시인의 허영심을 벗어나 소탈한 학자의 길을 원하는 것 같았고 석사학위는 서둘러 취득하는 것이 옳겠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인 정렬과 결의가 분명히 나타나고 성실한 학자적 인생관과 가치관이 엿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의 건강상태는 정상으로 보였는데 어느 날 들리는 소문은 좋지 않게 다가왔다.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질병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장기 결근으로 들어가고 서울의 청량리에 있는 어느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그를 찾아갔다. 병실에 들어가 C교수를 찾았으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구석에 낯익은 제복을 입은 대학생이 보이기에 유심히 바라보았더니 바로 옆에는 나를 향하여 손짓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가 바로 C교수였던 것이다. 나는 매우 놀랐다. 도무지 그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빨리 알아보지 못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경과에 대하여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는 시일이 좀 걸릴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일부러 찾아오느라고 수고하였다고 말하였다. 할 말을 잃고 당황하는 나에게 그는 침착한 어조로 “차츰 차도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을 건네주었다.

 

나는 도무지 어리둥절하였다. 항상 건강하게 보이고 온화한 성격에 겸손하기도 하고 복잡한 도시보다는 조용한 전원을 좋아하는 성품인지라 특별히 질병으로 고통을 겪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는데 불과 2~3개월 만에 쉽사리 알아볼 수조차 없으리만큼 중환자로 변하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그는 그 후 청주의 자택으로 퇴원하여 가정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하여 몇몇 교수들을 따라 문병하게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으나 나는 매우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수척하였고 얼굴에는 이상한 모양의 돌기가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논문을 완성하지 못한데 대하여 말하고 머지않아 출근하여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말을 하였다.

 

문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원로교수에게 들으니 그의 안면에 생긴 것은 매우 불길한 증상이며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것은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너무나 허무하고 냉혹한 운명이었다.

…….

나는 그의 장지로 달려갔다. 장례는 간소하게 진행되고 몇몇 교수들이 비통한 얼굴로 절차를 종결하였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무덤 앞으로 가서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통곡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억지로 참아보려고 하였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통곡은 멈추지 않았다. …… 어느 교수가 와서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나의 팔을 붙들고 그만 그치라고 애걸하였다. 나는 마치 그의 죽음에 대하여 하늘과 땅과 조물주와 모든 것을 원망하듯 깊은 슬픔을 내뱉으며 겨우겨우 마음을 가누고 통곡을 그치게 되었다.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제자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한 학자요 교수요 가장이요 나의 심우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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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

 

<월간수필문학> 등단(1992) 한국수필문학추천작가회 ·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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