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노래(가족)

서서히 일상으로의 복귀 2

송담(松潭) 2022. 10. 13. 07:25

서서히 일상으로의 복귀 2


< 1 >

 

정원의 잔디는 4월 말부터 시작해서 10월초까지 1년에 20회 정도 깎습니다. 특히 장마철에는 잔디가 잘 자라 1주일에 한 번씩 깎아야 합니다. 처음 잔디밭을 조성할 때 동네 분들은 잔디밭이 너무 넓어 관리가 힘들 거라며 몇 년 지나면 잔디밭을 줄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9년 째 잘 유지하고 있고 오늘은 올해 들어 6회차 잔디를 깎았습니다.

깎을 때는 힘들지만 작업을 마치고 나면 시원하게 펼쳐진 잔디밭이 정원을 한껏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밤에 정원에 나오면 낮에 깎은 잔디의 풀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에 확 들어옵니다. 전원에는 꽃과 나무만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풀향기도 납니다. 이제는 풋풋하면서 약간 비릿한 풀냄새가 좋아졌습니다.
(2022.6.24)

< 2 >

 

어제는 아들이 직장 때문에 순천 시내에서 여수로 이사를 했고, 오늘 그곳에서 가까운 구봉산에 올랐습니다. 정상까지 서서히 오르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되었고 등산로는 거의 숲으로 우거진 그늘이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니 여수 앞바다가 확 트여있었고 여수시내 전체가 사방으로 보였습니다. 요즘 도시 가까이 있는 산들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데 구봉산 숲길도 참 좋았습니다. 앞으로 여수에 오면 구봉산을 자주 찾아야겠습니다.
( 2022.6.12)

 

안개가 잔뜩 낀 구봉산을 오르면서 몽환적인 풍경을 보았습니다.
(2022.6.26 구봉산 세 번째 오름)


< 3 >



고향 고흥에 갔다가 팔영대교 등 연륙교를 거쳐 여수로 갔습니다. 시간이 없어 바다의 섬들을 자세히 구경하지 못하고 그냥 스쳤습니다. 연륙교나 섬들이 보이는 바다 풍경은 자주 보아 익숙해진 풍경입니다. 섬 관광은 그곳에서 하루쯤 숙식 하면서 세세히 살펴야 섬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 나면 언제 한 번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2022.6.25)


여수→고흥 간 연륙교는 여수시 화양면과 고흥군 영남면을 잇는 5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 화양면 → 조발도 : 화양조발대교
(2) 조발도 → 둔병도 : 둔병대교
(3) 둔병도 → 낭도 : 낭도대교
(4) 낭도 → 적금도 : 적금대교
(5) 적금도 → 영남면 : 팔영대교

화양조발대교로151 선섬 여수 힐링 쉼터(조발해오름언덕)
이곳은 여수와 고흥을 연결해 주는 섬섬대교들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입니다.

 


< 4 >

낙관론자 vs 비관론자



집사람은 빨강, 노랑 같은 화려한 색을 좋아하고 저는 녹색, 푸른색을 좋아합니다. 음악도 집사람은 템포가 빠른 경쾌한 음악을 좋아하고 저는 차분하고 멜랑꼬리(melancholy)한 음악을 좋아하는, 정 반대의 취향을 갖고 있습니다. 색깔과 음악을 기준으로 하면 집사람은 낙관적이고 저는 우울한 비관론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집사람은 조바심, 걱정이 많고 저는 비교적 무사태평이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비관론자는 신중하고 치밀하며 대안을 제시하지만 낙관론자는 소위 ‘마음 편해’ 좋으나 대책이 없어 사고위험의 개연성이 있습니다.

5개월 전 수술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저는 별 감각 없이 무디게 고통을 참아 왔지만 집사람은 무척 애민하게 관찰하고 ‘걱정스런 질문’을 하면서 따지고 해서 의료진들이 다소 싫어하는 보호자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위기를 잘 넘기고 퇴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낙관론자 보다는 비관론자의 대처방식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1월부터 시작된 제 병환은 며칠 전 외래에서 위내시경, CT, 혈액검사 결과 모두가 정상으로 나왔고 앞으로는 6개월 단위로 검사받기로 했습니다. 올 겨울이 암진단(1기초)과 수술로 혹한(酷寒)의 계절이었다면 봄부터는 따스한 순풍이 불어 순조롭게 회복되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 집 정원에 핀 장미꽃과 여러 꽃들이 여느 해보다 더 풍성하게 피었습니다. 백합에 이어 활짝 핀 나리꽃을 보면서 희망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고 낙관해 봅니다.
(2022.6.30)



< 5 >

조촐한 칠순


오늘 70회 생일을 맞았습니다. 칠순생일입니다. 예전 같으면 잔치를 해야 할 날이지만 요즘은 회갑은 물론 칠순잔치도 거의 하지 않는 것이 트랜드여서 저 역시 생략했습니다.

오늘은 아들이 퇴근하고 순천으로 와서 생일케익에 촛불 일곱 개를 켜주고 다시 여수로 갔습니다. 밤길 운전에 번거롭지만 자식의 도리를 하겠다고 잠깐 왔다간 아들이 고마웠습니다. 늙어갈수록 자식에 대한 애착이 더해가는 걸까요. 제가 아픈 후로는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지 매일 아들과 통화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남자들간에 대화는 아기자기한 맛이 없어 직접 통화 하지 않고 대신 집사람과 통화하는 것을 옆에서 엿듣고 있습니다.

아들의 말대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결혼하게 된다면 그때는 오늘처럼 조촐한 행사가 아니라 가족 이벤트가 되어 화기애애하고 즐거울 것 같습니다.
(2022.7.12)

 

 

< 6 >

빈 의자

 


산책을 하다가 비어있는 의자나 벤치를 보면 폰에 담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앉았을 의자가 비어있으니 쓸쓸하기도 하고 이 의자에 머물다간 사람들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 사진을 엊그제 화순전남대학교병원 뒤편 숲길을 산책하다 찍은 것인데 이 의자에 환자나 보호자들이 앉아 어떤 이는 조용히 눈물을, 어떤 이는 근심과 걱정으로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저마다 아프고 시린 사연들을 의자는 다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 중에서 꼭 중간에 ‘병(病)’의 과정을 거쳐 생을 마감할까요. 병 없이 그냥 ‘생로사(生老死)’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오복(五福) 중에 하나인 ‘고종명(考終命)’말입니다. 그래서 늙어서는 부자보다는 건강한 사람이 더 부럽습니다. 가을도 아닌데 의자 주변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낙엽이 흩어져 있습니다. 한적한 숲속의 벤치가 왠지 더 쓸쓸해 보입니다.
(2022.7.14)


< 7 >

친구 박형하와 카톡으로 대화


[김상권]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운동도 텃밭 일도 하지 않고 주로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봅니다.
따가운 여름햇볕 아래서 녹색 잔디는 속절없이 자라고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은 무심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집안에서만 머무는 일상이 따분해집니다. "빨리 날씨가 서늘해져야 밖에서 일을 할텐데....."
여름이 아직 한창인데도 성급히 가을을 기다리며 오늘도 이렇게 멍때리고 있습니다.

[박형하]

멋있는 노년의 전원 이야기 입니다.
멍때림은 <딴생각의 힘>이란 책에서 집중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멍때리고 딴 생각에 빠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극복해야할 나쁜 습관이 아니고 오히려 더 나은 나 "좀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좋은 습관이라며 권장하더군요.
밖에서 일하고 싶으니 건강은 염려에서 벗어난 듯하여 나의 마음을 유쾌하게 합니다.
굿밤 되세요.^^
(2022.7.14)



< 8 >

나의 눈빛



입추인 오늘 여수 구봉산에(6번째) 올랐습니다.
정상에 올라 친구 박형하에게 셀카사진을 보냈더니 다음과 같이 답이 왔습니다.

“베리 굿!
건강해 보입니다.
눈빛과 다문 입술에는
건강을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보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저는 눈썹이 진해서 그런지 첫인상이 “무섭게 생겼다”는 평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인상은 부드럽고 온화하기 보다는 ‘진하고 고약한 느낌을 풍기는 인상’이라고 스스로 자평합니다.

사진을 보고 친구가 “눈빛과 다문 입술에 강한 의지”가 보인다고 했는데
‘눈빛이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모습’이고 ‘좋은 징조’라고 자위(自慰)해 봅니다.
(2022.8.7)

오늘은 立秋


오늘은 立秋
들입(入)을 않 쓰고,
설입(立)을 쓴다.
우주공간으로 부터 가을 기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직은 복중(伏中)
무더위 속을 허덕여도
가을은 이미 저만치 와 있다는 그런 말일게다.

씨 뿌려 소중이 자라는 것들을 추수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늦뿌려 해 가기 전
거두지 못할 것이라도 있을까봐
이제라도 정성을 다해
키워내라는 그런 말일게다.

수고 했다고..

이젠 가을에 들어선다고
입추(立秋)란다.

그럼에도 태양이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것은
이 여름에 행여 못다한 일들을
짦은 가을 그리고 긴 겨울이 오기 전
어서 서두르라는, 그런 말일게다.

또, 가을이 오고 있다고
입추(立秋)란다.

아직도 심중에는
뿌려 보지도 못한
숱한 씨앗들이 그대로 인데

무심하게도 세월은 벌써
가을을 보내 왔으니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추상 보다
더 냉정한 그런 뜻인 것을,

어느듯 이제는 가을을
얘기 하여야 한다.

우리들의 가을 들녁에는
추수 할게 무어 있는지를...

< 좋은글 중에서 >

< 9 >

수옹(睡翁)/ 졸고 있는 늙은이



몇 년 전부터 책만 보면 눈이 피곤하고 졸음이 옵니다. 작년 12월 초 혈액검사를 시작으로 암수술을 거쳐 8개월 정도 독서를 못 하다가 며칠 전부터 다시 독서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역시 예전처럼 눈이 피로하고 졸음이 오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보면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빕니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책을 계속 볼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사실 지금은 책을 읽고 덮으면 거의 기억나는 게 없기 때문에 책을 읽으나 마나입니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이제는 교양을 쌓거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치매예방을 위해서 읽습니다. 70을 넘기니 총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티비의 뉴스나 연속극을 보면 청력이 예전 같지 않아 잘 듣지 못하고 눈동자도 빨리 굴리지 못해 자막글씨를 다 읽지 못하고 놓칩니다. 그러하니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눈도 귀도 어두워지기 시작한 육신이상 앞에 앉아 조는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측은하게 여길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사림파의 대표적 학자 정여창(1450~1504)자신의 호를 일두(一蠹 : 한 마리의 좀벌레)라고 지어 스스로 자신을 낮춰 부르고 또 다른 호를 ‘수옹(睡翁)’이라 했는데 이는 졸기를 잘하는 늙은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비록 정여창과 같은 유명한 학자와 비길 바는 아니지만 저 역시 육신의 쇠퇴로 이제는 꾸벅꾸벅 조는 노옹이 되고 말았습니다.

(2022.8.13)

< 위 글을 읽은 친구 박형하의 답장 >

늙어감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세밀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아쉬움을 넘어 수용의 단계에 오른 듯합니다.
다산은 노년유정심서에서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없는 작은 것은 보지 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뜻이요.

귀가 잘 안들리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고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다.

이가 시린 것은 연한 음식 먹고 소화불량 없게 하려 함이고,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말라는 것이리라.

머리가 하얗게되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든 사람이란 것을 알아보게 하려는 조물주의 배려이고,

정신이 깜박거리는 것은 살아온 세월을 다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나온 세월을 다 기억하면 정신이 돌아버릴 것이니 좋은 기억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하라는 것이리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늙음도 인생의 통과의례이니
그려려니 하고 삽시다.

오늘도 건강과 옷음이 가득하세요.


< 10 >

이어령의 눈물 한 방울

작년 12월초에 중단했던 독서를 며칠 전에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산 책이 고(故) 이어령교수님의 마지막 노트 ‘눈물 한 방울’입니다. 한 거목(巨木) 지성인이 죽음을 앞두고 메모형식으로, 시의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제가 암환자여서 그런지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공감을 한 것 같습니다.

모멘트 모리(Mo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고 살라고 말하지만 막상 죽음이 목전에 다가오면 누군들 두렵고 슬프고 괴롭고 힘들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는 암1기초이고 항암치료를 않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성은 수시로 자각됩니다.

이어령교수님은 지난 2월 26일 운명하시기 한 달 전까지 떨리는 손으로 글을 쓰셨습니다. 몇 문장을 소개합니다.

또 만나 라는 말에
눈물 한 방울
언제 또 만날 날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 고마운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절절합니다.

매일 한 금씩 줄어가는 몸무게.
무엇이 가벼워진다는 건가?
죄의 무게가. 생각의 무게가. 맥동과 박동과 움직임의 무게.
목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인가?”

병마와 싸우면서 나날이 줄어가는 몸무게를 보며 남아 있는 날의 무게도 가벼워지고 있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한 발짝이라도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자.
한 호흡이라도 쉴 수 있을 때까지 숨 쉬자.
한 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하자.
한 획이라도 글씨를 쓸 수 있을 때까지 글을 쓰자.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

생의 아쉬움이 한껏 묻어 있는 몸부림. 마지막 고군분투! 살아 있다는 것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암 선고를 받고 난 뒤로 어젯밤 처음
어머니 영정 앞에서 울었다. 통곡을 했다.
(....생략...)
차돌이 되어야지. 불안, 공포 그리고 비애 앞에서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는 차돌이 되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 그런데 울었다. ‘엄마 나 어떻게 해.’

울고 또 울었다. 엉엉 울었다.”

우리는 언제 통곡할 것인가? .......


이제는 내 손으로라도 끝내자.
참을 수 없는 밤들을 더 기다리지 말고
그 밤을 찢어버리자.
내 손으로 이제는 밤이 없도록
어느 저녁 노을을
아침 노을이라 생각하고
서쪽을 동쪽이라 생각하고
이제 엎드려 절 한 번 하고 떠나자.
지겨운 남은 밤들을 떠나자.”

병마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밤을 찢어버리자고 했겠습니까?
(2022.8.19)

< 11 >

 

내공(內工)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외출하지 않아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원래는 외향적(外向的)인 사람인데 은퇴 후에 변한 현상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3년 이상 계속되어도 별다른 불편이나 답답증 같은 것이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혼자서 잘 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友)태크를 잘 해야 오래 산다고 한다는 말이 있지만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반대 이론도 있습니다.

외부와 별다른 접촉 없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니 첫째는 전원생활을 하면서 풀을 매는 등 매일 일을 한다는 것이고 가끔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입니다.

‘외롭다’는 생각 대신에 ‘평화롭다’는 말이 제 맘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저에게도 어느덧 내공(內工)이 쌓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공이 쌓였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제가 지금 엄연히 암 환자지만(물론 1기초여서 그런지) 아무런 걱정없이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22.9.11)

< 12 >

철학 & 소설


< 철학공부 >


책장에 꽂힌 철학책을 세어보니 50권 정도 되었습니다. 이중 10여 권은 읽다가 중도하차한 책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던 책도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읽다보니 철학공부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결국 철학자들이 주장한 용어, 개념 등 이론을 이해하지 못했고 철학서적 중에서 철학에세이 정도 읽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물론 성균관대 김종엽 교수는 "철학에 이르는 길이란 이론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신과 세계를 위대한 책으로 삼아 스스로 사유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제가 철학을 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은 철학을 알면 뭔가 유식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접근한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철학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지 최근 안상헌작가가 쓴 ‘미치게 친절한 철학’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교보문고에서 구입해서 몇 꼭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역시 어렵고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철학은 학문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이해가 가능하고 교양으로 대충 알려고 했다가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잘 이해되지도 않은 두툼한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이런 골치 아픈 책을 읽어 뭐하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읽기를 조기에 포기하고 건강이 좀 더 좋아지면 궁금한 주제에 대해 발췌독을 해 볼까 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게 써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눈도 침침하고 책을 펼치면 곧장 졸음이 오는데 이런 노구(老軀)를 이끌고 꼭 지금 과욕을 부려야겠습니까.
(2022.9.18)


< 소설예찬(禮讚) >

 

저는 어릴 때부터 책과 그리 친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시절에 유행했던 무협지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제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서울에서 낙향하고 3년 정도 지난 2003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기관의 책임자로 독방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아서인지 안구운동이 발달되지 않아 속독을 못하고 정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20여 년간 읽은 책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1년에 20~30권 정도입니다.

저가 좋아하는 장르는 소설보다는 수필 역사 등 비소설 분야였습니다. 읽은 책 중에서 소설은 20% 정도나 될까말까 합니다.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좋아하는 소설작가는 조정래 김훈 등 극소수입니다. 그런데 소설 쓰기가 가장 어려운 고난도 창작활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정래 작가는 한국 해방전후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감칠맛 나게 표현해 냅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시리즈를 모두 읽었는데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쏟은 시간과 열정, 인내는 저에겐 불가사의한 것이었습니다. 김훈의 글 중에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가 그려내는 풍경은 아름답고 심오하고 잔잔하고 황홀합니다. 소설이 뿜어내는 문향에 그대로 취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수필은 아마추어도 쓸 수 있지만 소설은 프로가 되어야만 접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소설은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아포리즘, 잠언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 밑줄을 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소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이내믹하며, 아기자기하고 훈훈합니다. 결국엔 찡하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소설이야말로 이야기로 풀어낸 철학서입니다.

(2022.9.25)



< 13 >

기적 같은 존재들

 

전원생활을 하면 가끔 경이로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비올라꽃 씨가 날아가 벽돌의 작은 구멍에 안착하고 거기서 꽃을 피워냈습니다.

비올라 꽃은 늦가을에 모종으로 심는데 겨울을 지나 여름까지 핍니다. 혹독한 겨울을 넘기고 살아남지만 한여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하니 더위에 무척 약한 꽃인가 봅니다.

꽃이 지면 꽃씨가 발아되기도 하지만 잘 생육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래서 비올라 꽃은 한해살이 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작년 11월에 모종으로 심은 것은 이미 다 죽었는데 씨앗이 날아가 유여곡절 끝에 발아되어 마침내 꽃을 피워냈습니다. 그것도 벽돌의 조그마한 구멍 안에서.

작고 연약한 꽃 하나가 외로이 홀로 핀 것을 보며 존재하는 것들은 아름답고 생명이 있어 살아있음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꽃 한 송이도 기적처럼 피는데 인간의 살아있음은 그 차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한경 작가는 최근 저서 ‘당신이라는 기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에 찾아온 고난의 순간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해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과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고자 마음을 다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당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오늘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서 제 곁에 기적 같이 존재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나의 집사람과 사랑하는 나의 아들, 그리고 제가 아팠을 때 수시로 걱정해 주고 응원해 준 형제자매 친지들, 친구들, 이웃들, 옛 동료들...... 그들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 2022.10.12 )

< 14 >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빨간 홍시가 가을햇볕에 빛나고 있습니다.
이 홍시는 지금이 ‘절정의 순간’입니다. 머지않아 까치밥이 되어 소멸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삭풍에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맑은 홍시가 늦가을 담장에 걸린 ‘마지막 잎새’처럼 보입니다.

입동이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전합니다. 올 겨울도 건강하게 잘 넘기자고.
(202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