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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덮는 이불을 발밑에 두고

신선이 덮는 이불을 발밑에 두고 시간, 공간, 인간, 한세상 사는 일은 이 3간을 통과하는 일이다. 이 3간 중에서 비교적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공간이다. 상대적으로 시간,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다. 공간이 바뀌면 시간의 흐름도 달리 흘러간다. 교도소에서 보내는 시간과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 그 공간에서 만나는 인간의 종류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어떤 공간에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자기에게 기쁨을 주고 세상의 시름을 달래주는 특정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차인(茶人) 나광호 선생을 만나 보니, 이 사람은 생계 활동 이외의 시간만나면 지리산 형제봉을 올라가는 게 일이다. 형제봉에만 올라가면 삶의 의미가 느껴진다고 한다. 형제봉은 지리산 자락이 남쪽..

여행, 걷기 2024.03.26

고통이 주는 선물

고통이 주는 선물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만나는 이마다 이런 하소연을 한다. 행복은 저 멀리 신기루처럼 깜박일 뿐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전시된 타인들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의 남루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감당해야 할 인생의 무게가 태산처럼 느껴질 때 비애감도 덩달아 커진다. 고달픔, 서러움, 억울함의 감정은 무거운 추가 되어 우리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순간 지금이라는 기적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는 이들일수록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통은 즉시 제거되어야 할 적이다. 고통은 행복의 철천지원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

상처의 치유 2024.03.22

돈의 맛

돈의 맛 아무리 안전하게 가둬 놓는다 해도결국 사회가 해체한다. 십몇 년 전쯤이었던가. 명동의 사채업자를 알게 되어 몇 번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채업도 전문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력과 자격증은 필요 없었지만 나름대로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 전문성은 돈을 회수하는 능력이었다. 빌려준 돈이 회수가 안 되면 망한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을 판단하는 지인지감이 발달해 있었다. '이 사람이 돈 떼어먹고 도망갈 것인가?' 또 하나의 특징은 말을 짧게 하고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점이었다. 밥 먹다가 강호동양학의 장문인(?)을 제압하는 코멘트를 하나 날리는 게 아닌가! “조 선생, 돈맛을 압니까? 맛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아는 체를 합니까?” “무슨 맛입니까?" "죽어도 못 끊..

2024.03.03

예(藝) 안에서 놀다

예(藝) 안에서 놀다 '유어예(遊於藝)'라는 말을 좋아한다. 놀기는 놀더라도 '예' 안에서 놀면 후유증이 적다. 그 예가 종합적으로 녹아있는 공간이 원림이라고 생각한다. 원림은 한자문화권의 상류층과 식자층이 가장 갖고 싶어했던 공간이다. 나는 원림을 좋아해서 시간만나면 중국의 졸정원(拙政園)을 비롯한 전통 정원들을 보러 다녔다. 특히 양주의 원림 중에서도 개원이 취향에 맞았다. 일본 교토의 정원만 해도 볼만한 곳이 금각사 정원을 비롯하여 20여 군데가 넘는다. 문제는 이러한정원(원림)들을 조성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가산가수(假山假水,인공으로 조성한 자연)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원림은 돈이 적게 들면서도 그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자연에 있는 진산진수(眞山眞..

김수미/ ‘살아남기’중에서

김수미/ ‘살아남기’중에서 김수미 1975년 3월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제18회 공무원문예대전에서 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시골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살아남기 13 부자되세요 BC카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는 친구의 말에 그랜져로 대답했습니다 TV가 뭐라하든 광고가 뭐라하든 내 지갑 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본이 주인인 시대에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 금융업무를 하면서 몇억짜리 수표는 나에겐 종이 내 지갑 안에 만 원짜리가 실제 허구와 실제를 구별해야 한다 가끔 이렇게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면 불야성을 이루는 자본의 함성에 기죽지 말고 눈요기로만 즐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거든 밤하늘에 별이나 실컷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도 꿈꾸는 자본이 아닌 꿈을 향해..

공감 Best 20 2024.02.19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

공감 Best 20 2024.01.24

당나라와 측천무후, 양귀비

당나라와 측천무후, 양귀비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그 대신 당나라(618~907년)가 등장하게 됩니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 즉 당고조(재위: 626~635년)도 관롱집단이었습니다. 참고로 이연은 노자의 후손을 자처하며 자기가 황제가 되는 걸 정당화했다고 합니다. 당나라는 건국 직후 다소 정세가 불안정했습니다. 앞서 수나라 때 터져 나왔던 수많은 반란들을 이제 당나라가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죠. 당나라 조정은 반란을 일으킨 군벌들을 차례차례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이연의 아들 이세민, 즉 당태종太宗(재위: 626년~649년)이죠. 이세민은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자신의 아버지까지 쫓아내 황제가 되는 패륜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합니다. 패륜 행위로 정권을 잡았다 보니 이세민은 처..

역사 2024.01.07

전라도 하와이

전라도 하와이 “저어……, 이런 말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저어………… 그러니까 그게…………” 황연주는 말하기를 머뭇거리며 남편에게 눈길을 돌렸고, “무슨 얘긴데 그래? 무슨 문제든 여쭤봐. 한 선배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다니까." 이태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에, 다른 게 아니구요,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알고 싶었던 것인데, 전라도 사람에게는 물을 수가 없고, 딴 사람들한테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하는 건데요, 한 선생님이니까 안심하고 여쭤볼게요. 그게 다른 게 아니구요, 왜 전라도 사람들보고 '하와이, 하와이' 하면서 불신하고 나쁘게 생각하는지요.” 황연주가 한지섭의 눈치를 보아가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하하하…….” 한지섭이 고개까지 뒤로 젖히며 흔쾌하게 웃어대고는, “그 별명에도 아..

역사 2023.12.21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손채경 변호사님께 안녕하십니까. 뵙지 못한 상태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신문의 민노진 기자라고 합니다. 스마트폰 만능의 시대 현실에 안 어울리게 편지 쓰는 걸 이해하여 주십시오. 변호사님을 취재하려고 근무처로 열 번,예, 꼭 열 번을 찾아갔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대형 로펌의 파워가 엄청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저를 완전 차단, 거부하는 일을 당하면서 그 폐쇄적 파워를 여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완강한 배타적 조직 보호에 막혀 마음 단단히 먹었던 취재를 포기, 단념한다는 것은 기자의 근성상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개인정보보호법에 가로막혀 변호사님의 핸드폰 번호를 알 방도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더 무..

조정래 소설 2023.12.19

꿈을 가진 사람이 사는 법

꿈을 가진 사람이 사는 법 한 송이 꽃의 희망 할아버지 (1884년)가 계신 집안에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머님이 43세에 낳은 늦둥이다.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화순 읍내에서4~5킬로미터 떨어진 수만리 1구였고, 1~4구까지 네 개의 마을이 있고 아랫마을에 국동리가 있었다. 우리 마을은 가게 하나 없던 한적한 동네였다. 우리 집 뒤뜰로 돌아가면 장독대를 지나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매일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거나 멀리 이웃집과 동네를 내려다보곤 했다. 나는 자연 속의 소소한 행복을 좋아했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땅에 선을 그어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자치기놀이, 재기차기, 저녁엔 진도리(술래잡기와 비슷한 놀이)를 하고, 논둑에서 쥐불놀이와 풀베기 등을 했다. 머리핀 따먹기와 동전 던지..

장기양 수필 202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