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에 관하여

예(藝) 안에서 놀다

송담(松潭) 2024. 3. 3. 11:43

예(藝) 안에서 놀다

 

 

'유어예(遊於藝)'라는 말을 좋아한다. 놀기는 놀더라도 '예' 안에서 놀면 후유증이 적다. 그 예가 종합적으로 녹아있는 공간이 원림이라고 생각한다. 원림은 한자문화권의 상류층과 식자층이 가장 갖고 싶어했던 공간이다. 나는 원림을 좋아해서 시간만나면 중국의 졸정원(拙政園)을 비롯한 전통 정원들을 보러 다녔다. 특히 양주의 원림 중에서도 개원이 취향에 맞았다. 일본 교토의 정원만 해도 볼만한 곳이 금각사 정원을 비롯하여 20여 군데가 넘는다. 문제는 이러한정원(원림)들을 조성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가산가수(假山假水,인공으로 조성한 자연)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원림은 돈이 적게 들면서도 그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자연에 있는 진산진수(眞山眞水)이기 때문이다. 호남의 양대 원림인 담양 소쇄원과, 강진 백운동 원림이 그렇다. 백운동 원림은 진산중의 진산인 월출산 자락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원림의 핵심인 석가산(石假山)이 필요 없다. 뒷산이 바로 엄청나게 기가 센 월출산 옥판봉이 산수화처럼 도열해 있지 않은가! 옥판봉은 마치 금강산 만물상 같은데, 중국, 일본 정원의 석가산은 감히 여기에 대지도 못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왔을 때 원주 이씨들 소유의 이 백운동 원림에 출입하게 되었고, 백운동 주인의 어린 아들인 이시헌이 9세 때부터 다산문하에서 놀게 되었다. 다산은 강진 유배가 끝나 1818년 두물머리로 돌아가면서 18명의 제자와 *다신계를 맺었다. 이시헌은 당시 17세로 나이가 어려 다신계의 공식 멤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경기도 두물머리의 다산에게 월출산 옥판봉 밑의 찻잎으로 떡차를 만들어 꾸준히 보낸 제자는 이시헌이었다. 이후로도 백운동 집안은 100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다산가에 차를 보내는 신의를 지켰다.

 

차의 제조 방식은 다산이 직접 알려준 삼증삼쇄(三蒸三驪)의 방식이었다. 3번 솥에다 찌고 3번 말리는 방식. 다신계의 약속은 이시헌의 손자뻘인 이한영(李漢永, 1868~1956)에 의해 지속되었다. 또한 이한영은 왜정 때인 1920년대에 우리 차가 일본 상표로 둔갑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어서 '白雲玉版茶(백운옥판차)'라는 국산 브랜드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한국 최초의 차 브랜드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다부(茶父)이다. 이한영이 살았던 집이 원림 옆의 월남사지 3층 석탑 아래에 있었고, 그의 고손녀 이현정이 삼층석탑처럼 꿋꿋하게 차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조용헌 / ‘내공’중에서

 

* 다신계는 강진에 18년 동안 머물던 정약용이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떠나면서 제자 18명과 차로 믿음을 이어가자며 만든 차 모임이다. 다신계 회칙에는 곡우와 입하에 차를 만들고, 봄가을에 두 차례 운을 제시해 시를 짓자는 등 8가지 약조들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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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6가지 덕성

 

 

백살까지 사는 세상에 인생 이모작은 뭐를 하지? 글을 안 쓰면 뭐를 할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 대안으로 차를 만드는 '제다’ 일을 해 보면 어떨까.

 

우선 나 자신이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음차흥국(飮茶興國)이라는 말도 있다. 차를 마셔야 사람들의 건강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니까 말이다. 차는 사시사철 녹색의 푸르름을 간직한 나무이자 식물이다. 푸르른 차밭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안개 낀 아침에 차밭을 거니는 것도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그리고 원고 마감의 압박감을 누그러뜨리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이야' 하고 나를 달래준 것도 차이다.

 

유럽에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구릉지대에 펼쳐진 와이너리에 가서 그 어떤 충족감을 느낀다고 한다면, 한자 문화권의 아시아 사람들은 차밭에 갔을 때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서양 포도밭의 대구(對句)는 동양의 차밭이다. 차밭에서 생각을 정리한 중국의 우정량이라는 사람이

꼽은 차의 10가지 덕성은 설득력이 있다. 그 가운데 6가지를 추려 본다.

 

첫째, 우울한 기분을 흩어지게 한다(다산울기 茶散鬱氣)

둘째, 차는 생기를 북돋운다(다양생기 茶養生氣)

셋째, 병을 제거한다(다제병기 茶除病氣)

넷째, 차로써 공경을 표한다(이다표경 以茶表敬)

다섯째, 몸을 닦는다(이다수신 以茶修身)

여섯째, 마음을 고상하게 만든다(이다아심 以茶雅心)이다.

 

요즘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너무나 우울하다. 상대방을 너무 미워하고 증오한다. 평화롭게 사는 법을 잃어버렸다. 정치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인데, 이 사이비 종교를 믿는 광신자가 너무 많아져서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한다. 거품을 물면 사이비 종교의 징표이다. 입에서 나오는 게거품을 씻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늘 혼자 찻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우울을 없애고 생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이다.

 

남들 다 게거품을 물고 살든지 말든지 제 팔자이다. 도가의 노선은 사회 구원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노선이다. 나는 도가이니까 차밭이나 둘러봐야겠다. 봄에는 곡성에 있는 야생차밭 '산절로 야생다원'에서 찻잎을 따 보았다. 짜증 나는 더위가 가신 엊그제 초가을에는 강진의 '이한영 차문화원'에 가서 1박 2일 제다 교육을 받았다. 차에는 6대 다류가 있었다. 녹차, 백차, 청차, 홍차, 황차, 흑차였다. 6가지 차마다 각기 색깔도 달랐다. 향기도 달랐다. 맛도 달랐다. 6가지 차향을 맡다 보니 마음속 근심이 줄어든다.

 

조용헌 / ‘내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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