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에 관하여

레이차를 만들며

송담(松潭) 2024. 4. 16. 05:52

레이차를 만들며

 

 

아침마다 레이차擂茶를 한잔 마신다. 레이차는 풀을 갈아 마시는 차이다. 이렇게만 쓰면 자연으로 돌아가다 못해 아무 풀이나 뜯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나 싶겠지만 레이차는 중국의 오랜 전통이 축적된 세련된 음료이다. 자연친화적일 뿐 아니라 영양가도 높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한 첨단 유행식품이기도 하다. 레이차의 '레이'는 한자로는 갈 뢰擂를 쓰는데 손 수手옆에 천둥 뢰雷가 합쳐진 글자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천둥차밥thunder tea rice’ 으로 불린다. 찻물에 곡류를 넣어 한 끼 식사처럼 먹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통 녹차가 찻잎을 우려서 마시는 데 반해 레이차는 먹을 수 있는 온갖 풀과 나뭇잎으로 만든다. 녹차는 이뇨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도 많고 차나무가 없다면 사서 먹을 수밖에 없지만, 레이차는 살고 있는 동네의 다양한 식물로 누구나 쉽게 자기에게 맞는 차를 만들 수 있다.

 

레이차를 만드는 법은 쉽다. 레이라는 말대로 풀이나 잎을 갈아서 만든다. 레이차에 들어가는 재료는 계절과 지역에 따라 다르다. 먹을 수 있는 풀과 나뭇잎은 다 쓸 수 있다. 보통 7가지 종류의 풀을 쓴다고 하는데 대만과 말레이시아의 찻집에서는 쑥, 바질, 박하, 고수, 찻잎을 주로 쓰는 모양이다.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입맛 당기는 제철 산나물이나 먹을 수 있는 나뭇잎을 마음대로 고르면 된다. 다만 한 종류가 아니라 적어도 다섯 종류 이상을 섞어야 한다.

 

산과 들에서 뜯어 온 식용 풀과 나뭇잎을 기름에 살짝 볶은 후 그대로 곱게 갈아서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 녹색 즙에 땅콩이나 들깨, 호두, 잣, 연밥 같은 견과류나 튀긴 곡물, 국수, 삶은 콩이나 팥, 두부 다진 고기를 넣어서 먹는다. 말하자면 나물로 만든 말차이자 즉석식사의 베이스 국물이다.

 

나는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 레이차로 마실 풀 을 뜯는다. 씀바귀와 모싯대, 비비추, 쑥, 엉겅퀴, 어성초, 원추리, 당귀 잎, 바질, 깻잎, 루꼴라, 차즈기, 뽕나무잎, 더덕잎, 산국 등등 마당에는 먹을 수 있는 잎이 무척 많다. 대부분 꽃 보자고 심거나 마당에 솟아난 식물인데 워낙 들꽃들을 좋아하다 보니까 약초로 쓰이는 풀이 마당에 많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간이 나빠진 다고해서 간에 좋은 쓴 풀, 씀바귀를 제일 많이 넣는데 익혀서인지 섞여서인지 신기하게도 쓴맛은 거의 나지 않는다.

 

기름에 볶으라는 정통 레이차 방식을 따르지 않고 나는 풀과 잎들을 끓는 물에 데친다. 식물성 기름은 압착식이 아닐 경우 몸에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데친 잎에 들깨나 참깨를 넣고 간다.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차로 마신다. 기호에 따라 소금이나 꿀, 설탕을 넣어 마시기도 하는데 나는 소금 쪽이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미네랄은 영어 단어가 말해 주듯이 광물질이다 .땅 속의 광물질을 식물이 끌어올리고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의 몸속에도 축적이 되어 동물을 살게 한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같은 사람 몸을 구성하는 기본 영양소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미네랄과 비타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건강하려면 3대 영양소뿐 아니라 비타민과 무기질을 갖춰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식물에 이 영양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식물성 비타민과 무기질을 통칭하는 피토케미컬(식물약성)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 레이차는 피토케미컬의 진수이다.

 

레이차는 주변에서 손쉽게 구하는 재료로 만드니 누구나 먹을 수 있고 익혀서 먹으니 병균과 기생충에서 안전하다. 반드시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하는 녹즙보다 자연친화적이다. 비료나 농약을 치지 않은 자연의 풀이라 질소과잉 같은 부작용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레이차는 중국에서도 한족의 고갱이를 자부하는 학가족의 유산이다. 학가족, 또는 객가客家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고향을 떠나 남쪽에 정착한 한족을 일컫는다. 멀리는 기원전 3세기 서진의 난리 때 옮겨 온 사람부터 (무릉도원의 주인도 이들이다) 당나라가 들어설 때, 송나라가 망했을 때, 청나라가 들어섰을 때 등등 이민족이 주류가 된 왕조가 세워질 때마다 고향을 떠난 한족의 후예라 하여 객가족은 한족 정통이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공부도 열심히 시키고 돈도 잘 벌어서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본토는 물론 전 세계에서 화교로 이름을 떨치는 이들은 거의 다 객가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광동지역을 비롯한 남부지방에 많고 대만에서도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이 있는 곳에서 레이차가 생활음료이다.

 

중국인의 기대수명은 2015년 월드뱅크 기준 75.99세이다. 중국보다 평균 소득이 5배는 많은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겨우 두어 살 많은78.74세이다. 경제력에 비해 중국인의 수명이 이렇게 높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몫은 오랜 전통에서 나온 풍요로운 식생활이다. 그중에서도 레이차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맛있게 이롭게 먹는 법을 탐구하는 중국식 실용이 무르익어서 완성된 가장 이상적인 음료이지 싶다.

 

나물반찬을 잘 만들어 먹는 이들에게는 굳이 필요 없는 차겠지만 아직도 나물반찬만은 서툰 내게는 레이차가 피토케미컬을 흡수하는 가장 맛있는 방법이다. 따끈한 레이자를 마시면서 생각한다. 하늘에서 공짜로 쏟아지는 햇볕만 받고 땅의 영양소를 끌어올려 그토록 무성하게 자라나 주는 식물들. 그렇게 얻은 유익함을 수많은 동물들의 먹이로 기꺼이 내주는 식물들. 이런 존재야말로 고귀하다고 불릴 자격이 있지 않을까.

 

서화숙 / ‘나머지 시간은 놀 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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