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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 / 이기은   기다림은 비어있는 하얀캔버스연두색 봄, 녹음 짙은 여름붉은 정열의 가을을 그리고남긴 여백은 하얀 겨울다음엔 고즈넉한 기다림 기다림이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내 가슴에 있기에누군가의 마음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기다림은 기다림만으로 아름답다 기다림의 공간에 끝 없는 그림을 그린다빼곡하게 채워져도 지우지 않고그 위에 덧 그린다삶이 지루한 날갈피갈피 걷어내며 어제를 추억하려곱게 분단장 시켜놓고 꼭 보담어 안으려 기다림은 온전히 내게서 잉태된선홍빛 열정이기에... 출처 : 다음카페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쉼터’

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김영민 / ‘가벼운 고백’중에서  1.드립에 대하여 드립은 거짓말과 다르다. 상대가 그 말이 드립임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즉 드립을 다큐로 받는다면 그 드립은 실패한 것이다. 누군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드립을 잘 치는 영재 소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 당연히 이스탄불이 좋지!" 여기서 아이는 결코 누군가를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대답을 들은 사람도 아이가 엄마, 아빠보다 이스탄불을 더 사랑한다고 믿지 않는다. 아이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상대질문을 파훼하기 위해 드립을 구사한 것뿐이다. 드립은 훈계와 다르다. 훈계는 화자가 청자의 우위에 선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훈계는 심미적 요소보다 도덕적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지루하다. 성공한 드립은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허를 찔린 상..

최근 읽은 책 2024.07.17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성향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성향  머리가 좋다고 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고 공부 잘한다고 다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아주 탁월하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어느 수준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야 그 정도의 학업성취를 이룰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타고난 지능이 곧 학업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머리 좋은 학생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명문 대학교나 과학영재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평생 동안 ‘머리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사는 복을 누린다. 하지만 명문대를 나왔으나 그리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을 그동안 나는 많이 봐왔다.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는 일단 차치하고,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성품에 ..

그 어느 날의 통곡 (1)

그 어느 날의 통곡 (1)    나는 이따금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온 셈이지만 나도 그들처럼 통곡하면서 똑 같은 심정을 경험하였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나에게는 우연하게 통곡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도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 같고 전혀 예기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만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보게 되는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였던 것이 떠오른다.  나는 C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조교생활을 하다가 강의를 한 과목 맡게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너무 궁핍한 형편이었다. 당시의 대학조교는 교육부에서 규정한 ‘보수규정’을 적용하지 않고 ‘무보수’로 발령하면서 ‘월수당’을 적당히 지급하였는데 그 수당이 대학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초·중고 교사의 반의 반도 안 되어 세금을 공제하고 난..

청계산 수필 2024.06.23

자연에 가까운 명품 정원

자연에 가까운 명품 정원   우리 동네 전원주택은 토부다원을 비롯해 명품 정원이 여러 군데입니다. 모두들 각자가 지상의 천국을 가꾸고 삽니다. 주거공간으로써 아파트는 경제적 가치가 높고 편리하지만 전원주택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의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눈앞에 열린 푸른색은 풋풋하고 싱그럽습니다. 정원을 돌며 아름다운 꽃을 보면 그 절정의 순간들이 눈과 마음을 환하게 하고 코끝에 스치는 야릇한 향기는 한 순간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하는 호접몽을 생각하게 합니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했는데 이 고사는 자아와 자연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라 합니다...

전원일기 2024.06.22

한 송이 꽃의 희망

한 송이 꽃의 희망   할아버지(1884)가 계신 집안에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머님이 43세에 낳은 늦둥이다.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화순 읍내에서 4~5킬로미터 떨어진 수만리 1구였고, 1~4구까지 네 개의 마을이 있고 아랫마을에 국동리가 있었다. 우리 마을은 가게 하나 없던 한적한 동네였다. 우리 집 뒤뜰로 돌아가면 장독대를 지나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매일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거나 멀리 이웃집과 동네를 내려다보곤 했다. 나는 자연속의 소소한 행복을 좋아했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땅에 선을 그어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자치기놀이, 재기차기, 저녁엔 진도리(술래잡기와 비슷한 놀이)를 하고, 논둑에서 쥐불놀이와 풀배기 등을 했다. 머리핀 따먹기와 동전 던지거나 동전치기 등은 할 때..

장기양 수필 2024.06.17

저출생 시대, 자해하는 양가 외동아이들

저출생 시대, 자해하는 양가 외동아이들  한 여학생이 부모, 할머니, 외삼촌 등 무려 4명의 보호자들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왔다. 그 여학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해라고 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여학생 세계는 자해공화국에 가깝다. 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칼과 몸, 정확히는 칼과 마음이 가깝다. 2022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중고생 10명 중 4명이 스트레스로 자해 생각을 한다. 2021년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조사에서는 10대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최근 2주 안에 자해를 생각해보았다고 답했다. 세종시를 비롯한 몇몇 지역 교육청 실태조사들에서 자해행동을 실제로 한 10대 청소년은 10명 중 1명 이상이고, 대다수가 여학생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대부분 ..

상처의 치유 2024.06.05

이기호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중에서

이기호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중에서   비치보이스 우리도 해수욕장에나 놀러 갈까? 춘길이가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그냥 먼 산이나 바라보면서 하품이나 하고 넘어갈걸....... 왜 그랬을까? 왜 나나 덕진이나 그 말에 그렇게 쉽게 혹하고 넘어가고 만 것일까? 아마도 춘길이가 했던 그다음 말, 그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도 해수욕도 막 하고, 여대생들한테 막 헌팅도 걸고, 또 막, 또 막 그러는 거지. 스물두 살 백수 처지에, 남들 다 가는 대학교도 못 가고, 그렇다고 무슨 직업 훈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9월 군 입대 영장마저 받아놓은 처지이니, 그래, 객기라도 한번 부려보는 심정으로,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자들이 우리 대학생 아닌 거 금세 눈치채면 어쩌..

김도윤/'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중에서

김도윤 /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밥 병원에 입원했던 엄마가 잠시 한두 달 정도 퇴원한 적이 있었다. 퇴원 후, 엄마는 언제나처럼 내게 밥을 차려 줬다. 대단한 반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소고기뭇국에 멸치볶음, 김치, 그리고 보리밥, 국 한 가지에 반찬 두 가지, 밥 한 공기였을 뿐이지만 내겐 임금님 밥상보다 귀한 상이었다. 정말 먹고 싶었지만 1년 동안 먹지 못했던 엄마가 차려 준 밥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시는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차려준 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슬픈 시간이기도 했다. 앞으로 다시 이밥을 먹을 수 있을까, 내게 이런 기회가 또 있겠냐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밥을 두 공기, 세 공기 먹었다. ..

최근 읽은 책 2024.05.23

슬플 것 같아요

슬플 것 같아요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장애인 인권교육 강의를 마친 뒤 질문 시간에 한 여학생이 나에게 장애인이 되어 억울하냐고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의사의 과실로 인한 의료사고로 장애인이 된 게 원망스럽냐는 질문이었다. 질문한 학생을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원망스럽지 않다가, 언젠가 문득 원망스러웠다가, 이내 다시 원망스럽지 않게 되었다고. 연이은 수술을 거치며 줄곧 병실에 누워 있던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삶은 힘겨웠지만, 이상하게도 의사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장애, 마비, 질병을 감내하는 시간 자체는 나에게 원망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문득 스무 살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가고, 처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스스로 거울을 보다 내 몸이 아름답게 대상화될 수 없는 ‘작고 휘고 취약한..

상처의 치유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