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꽃의 희망
할아버지(1884)가 계신 집안에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머님이 43세에 낳은 늦둥이다.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화순 읍내에서 4~5킬로미터 떨어진 수만리 1구였고, 1~4구까지 네 개의 마을이 있고 아랫마을에 국동리가 있었다. 우리 마을은 가게 하나 없던 한적한 동네였다. 우리 집 뒤뜰로 돌아가면 장독대를 지나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매일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거나 멀리 이웃집과 동네를 내려다보곤 했다.
나는 자연속의 소소한 행복을 좋아했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땅에 선을 그어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자치기놀이, 재기차기, 저녁엔 진도리(술래잡기와 비슷한 놀이)를 하고, 논둑에서 쥐불놀이와 풀배기 등을 했다. 머리핀 따먹기와 동전 던지거나 동전치기 등은 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였다. 동네 우물가는 아낙네들이 모여 동네 소식을 나누거나 안부 인사를 하는 소통의 장소였는데, 이낙네들의 웃음소리는 듣기만 해도 즐거웠다. 우리 집엔 물지게로 물을 나를 수 있는 사내들이 많아 다른 집에 비해 물이 풍족했다.
어느 날, 마을 가까이에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여섯 살 때 학교에 가서 1학년 학생들과 어울리며 교실에까지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너는 내년에 오거라." 하시며 웃으셨다. 그날 이후 선생님과 학교가 너무 좋았던 나는 눈만 뜨면 학교로 향했고,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실도, 학생 수도 적었기에 1학년과 6학년, 2학년과 5학년이 한 교실에서 수업했고, 선생님은 두 개의 반을 맡았다.
학교 앞에는 도로가 나 있었는데, 큰 재 너머에서 트럭이라도 넘어 올라치면 아이들과 함께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 구경하기에 바빴다. 트럭이 출발하면서 차 뒤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운전기사는 서서히 달리다가 멈춰 우리를 타이르곤 했다. 점심시간에는 강냉이 죽을 끓여 다같이 나눠 먹었고, 그릇과 수저만 챙기면 매일 따뜻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적은 인원이었기에 가족같이, 형제같이 학교에 다녔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나는 중학교 시험을 준비했다.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치열한 입시에 시달렸다. 졸업반은 남학생 15명, 여학생 10명으로 총 25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 날 어찌된 일인지 집에 왔더니 나의 정근상과 우등상이 놓여 있었다. 졸업앨범은 졸업사진한 장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이게 내 어릴 적 최초의 사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줄곧 반장만 하던 친구는 광주로 진학했고, 시험에 합격한 몇몇 친구들은 읍내 화순중학교로 진학했다. 43가구인 우리 마을(수만리 1구, 물촌 또는 수촌)에서는 나혼자 중학교에 입학했고, 수만리 4구(중지)한 명, 아랫마을 국동리는 두 명이 입학했다. 당시는 그 정도로 중학교에 간 친구는 많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운동화'라는 걸 처음 신어보게 되었다. 가방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보자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아침 일찍 어머님이 깨워 주시면 나는 밥을 먹고 도시락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교복을 입고 운동화 신고 학교로 향했다. 먼 거리였지만 학교에 간다는 건 아주 특별하고 즐거운 일이였다.
꽃을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집안 뒤뜰에 한 평쯤 꽃밭을 일구었다. 봄이면 자갈을 채워주고, 봉숭아·채송화 • 해바라기 등 몇 가지 꽃씨를 뿌렸다. 여름이 지나 가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재롱을 부리는 꽃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기 검사를 하던 선생님이 나의 일기를 칭찬하며 낭송한 적이 있다.
"꽃을 가꾸는 마음은 나의 마음을 가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애국하는 길이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는 일은 '애국'이라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온 정성으로 기울어야 한 송이의 꽃을 피울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꽃을 아주 좋아한다. 작은 씨앗 하나가 서서히 아름다운 꽃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좋아한다. 꽃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의 희망과 같다.
나의 큰 형님은 중학교를 중퇴했고, 셋째 형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큰누나. 작은누나.둘째 형님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겠다는 희망을 키워 나갔다.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장기양
• 2017년 6월 30일 서대문우체국 정년퇴직
• 한국우편엽서회 총무이사
• 전우신문 장려상 수상
• 대한적십자사 헌혈 유공 금장
출처 :정우소식 2024.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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