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양 수필

꿈을 가진 사람이 사는 법

송담(松潭) 2023. 12. 19. 21:11

꿈을 가진 사람이 사는 법
 

한 송이 꽃의 희망
 
할아버지 (1884년)가 계신 집안에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머님이 43세에 낳은 늦둥이다.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화순 읍내에서4~5킬로미터 떨어진 수만리 1구였고, 1~4구까지 네 개의 마을이 있고 아랫마을에 국동리가 있었다. 우리 마을은 가게 하나 없던 한적한 동네였다. 우리 집 뒤뜰로 돌아가면 장독대를 지나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매일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거나 멀리 이웃집과 동네를 내려다보곤 했다.
 
나는 자연 속의 소소한 행복을 좋아했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땅에 선을 그어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자치기놀이, 재기차기, 저녁엔 진도리(술래잡기와 비슷한 놀이)를 하고, 논둑에서 쥐불놀이와 풀베기 등을 했다. 머리핀 따먹기와 동전 던지기나 동전 치기 등은 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였다. 동네 우물가는 아낙네들이 모여 동네 소식을 나누거나 안부 인사를 하는 소통의 장소였는데, 아낙네들의 웃음소리는 듣기만 해도 즐거웠다. 우리 집엔 물지계로 물을 나를 수 있는 사내들이 많아 다른 집에 비해 물이 풍족했다.
 
어느 날, 마을 가까이에 국민학교(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여섯 살 때 학교에 가서 1학년 학생들과 어울리며 교실에까지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너는 내년에 오거라." 하시며 웃으셨다. 그날 이후 선생님과 학교가 너무 좋았던 나는 눈만 뜨면 학교로 향했고,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실도, 학생 수도 적었기에 1학년과 6학년, 2학년과 5학년이 한 교실에서 수업했고, 선생님은 두 개의 반을 맡았다.
 
학교 앞에는 도로가 나 있었는데, 큰 재 너머에서 트럭이라도 넘어을라치면 아이들과 함께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 구경하기에 바빴다. 트럭이 출발하면 차 뒤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운전기사는 서서히 달리다가 멈춰 우리를 타이르곤 했다. 점심시간에는 강냉이죽을 끓여다 같이 나눠 먹었고, 그릇과 수저만 챙기면 매일 따뜻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적은 인원이었기에 더 가족같이, 형제같이 학교에 다녔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나는 중학교 시험을 준비했다.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치열한 입시에 시달렸다. 졸업반은 남학생 15명, 여학생 10명으로 총 25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 날 어찌된 일인지 집에 왔더니 나의 정근상과 우등상이 놓여 있었다. 졸업앨범은 졸업사진 한 장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이게 내 어릴 적 최초의 사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줄곧 반장만 하던 친구는 광주로 진학했고, 시험에 합격한 몇몇 친구들은 읍내 화순중학교로 진학했다. 43가구인 우리 마을(수만리 1구, 물촌 또는 수촌)에서는 나 혼자 중학교에 입학했고, 수만리 4구(중지) 한 명, 아랫마을 국동리는 두 명이 입학했다. 당시는 그 정도로 중학교에 간 친구가 많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운동화'라는 걸 처음 신어보게 되었다. 가방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보자기에, 고무신을 신고다녔다. 아침 일찍 어머님이 깨워 주시면 나는 밥을 먹고 도시락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교복을 입고 운동화 신고 학교로 향했다. 먼 거리였지만 학교에 간다는 건 아주 특별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꽃을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집안 뒤뜰에 한 평쯤 꽃밭을 일구었다. 봄이면 자갈을 주워내고, 봉숭아 채송화 해바라기등 몇 가지 꽃씨를 뿌렸다. 여름이 지나 가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재롱을 부리는 꽃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기 검사를 하던 선생님이 나의 일기를 칭찬하며 낭송한 적이 있다.
 
"꽃을 가꾸는 마음은 나의 마음을 가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애국하는 길이다.”한 송이의 꽃을 피우는 일은 ‘애국’이라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온 정성을 기울어야 한 송이의 꽃을 피울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꽃을 아주 좋아한다. 작은 씨앗 하나가 서서히 아름다운 꽃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좋아한다. 꽃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의 희망과 같다.
 
나의 큰형님은 중학교를 중퇴했고, 셋째 형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큰누나 작은누나. 둘째 형님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럼에도나는 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겠다는 희망을 키워 나갔다.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1971년 여름, 광주 조선대 부속병원(1971년 4월 15일 개원일)을 찾았다. 어릴 적 머리에 하얗게 피부병(버짐, 기계독)이 있었는데, 초등학교때 아이들이 놀려 대곤 했었다. 어머니가 양잿물을 끓여 머리에 발라주기도 했었지만, 나을 리가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아이들이 날 놀려 대자, 어머니는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남광주에서 조대병원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병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그런데 병원 앞에 도착하자 기사 아저씨가 택시비를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무료로 차를 탔다고 하니, 기사 아저씨는 셔틀 버스와 택시의 구별법을 알려 주고 택시비를 받지 않았다. 나는 셔틀 버스와 택시가 다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몇 번의 병원 치료만으로 피부병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신설학교인 진흥고에 입학했다. 서울 신일고를 본떠 신축한 학교였는데 여섯 개의 반이 있었다. 막상 진학은 했지만 숙소가 없어 광주 고모 댁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죄송한 마음에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전남일보(사장 김남중) 보급소를 찾았다. 나는 140여 부로 광주 대인동, 계림동, 풍향동, 중흥동을 뛰어다니며 신문을 배달했다. 한 달에 2,000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면 바로 보급소로 향해 신문을 배달했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신문 대금의 수금이었다. 당시 신문 대금은 350원이었는데, 지금처럼 지로용지나 자동이체가 아닌 일일이 수금을 해야 했다. 350원, 300원, 280원, 250원 심지어 150원 할인 독자까지 있어 수금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신문을 들고 배달을 나갈 때는 5부 정도 여유있게 가지고 나가 몇 부는 리어카 튀김장수의 튀김 몇 개와 바꿔 먹고, 한 부는 버스 요금으로 사용했다. 그 시절이었으니 가능했던 것 같다.
 
가을 어느 날이었다. 신문 확장을 위해 광주고 육교 건너편 팥죽집에 들러 신문 구독을 권했다. 아주머니는 신문구독은 어렵고, 배가 고플 테니 신문 한 부 놓고 팥죽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하셨다. 그날 이후 아주머니는 늘 신문 한 부에 팥죽 한 그릇을 내주셨다. 눈치 보지 말고오라는 아주머니의 따뜻한 말씀에 나는 배달을 마치고 팥죽을 먹고가곤 했다.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젖은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 버스 안내양 바로 뒷좌석에 앉은 적이 있었다. 안내양은 손을 내밀어 내게 10원짜리 하나를 쥐여 주었다. 버스 기사 몰래 건네준 따뜻한 마음이었다. 신문 배달 일은 힘들었지만 이웃들의 배려와 나눔으로 이겨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배달 일을 마치고 공부하려고 하면 고모님은 늘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화를 내곤 하셨다. 전기세가 아닌 다른 뜻이었음을 지금은 알지만, 순진했던 나는 호롱을 사 등유를 준비해 호롱불에 공부했다. 1년이 지나 고모님은 나를 더이상 돌보지 못하겠다고 하셨고, 나는 광주에서 자취하던 친구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신문을 배달하며 학교에 다녔는데, 여름방학을 앞두고 친구는 불편하다며 따로 사는 게 좋겠다고 했다. 대안이 없던 나는 집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누나네로 올라가는 게 좋겠다며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셨다. 지금 같으면 휴학계를 내고 돈을 벌어 학교에 복학하겠지만, 당시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서울행 완행열차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17세 소년은 기가 죽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누나네는 동숭동 서울 문리대 뒤편에 있는 산동네였는데, 그곳은 물을 길어다 쓰는 꼬막촌이었다. 나는 누나의 살림을 돕다가 1974년 장승배기 (노량진동)로 이사 간 후, 누나의 도움으로 관광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1년 동안 관광학개론과 일본어 등을 배우며 관광종사원으로 일을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형이 월남에서 가지고 온 전축으로 단파 라디오를 청취하곤 했는데, <라디오 일본> 방송은 하루에 45분씩 했다. 그 무렵 일본은 단파방송 청취가 보편화되고 300만 명이 넘었지만, 한국에는 공개하지 않았다. 단파는 이북 방송도 청취가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관광학원 교수님은 나를 호텔에 취직시키려 했지만 당시 미성년자였던 나는 취직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쪽 길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로 했다.
 
낮에는 형을 따라 화문석 돗자리 등을 짊어지고 다니며 팔았고, 가을에는 리어카에 대바구니 등을 싣고 다니며 팔았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물건을 팔면서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은 더 커져만 갔다. 틈만 나면 시집과 에세이집, 대학교수님이 쓴 인생론집 등을 읽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지나가는 학생들 가방만 봐도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1977년도에는 신양전기(온수동)에서 1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는데 장사와 비슷하게 비전이 없었다.
 
성인이 된 나는 1977년 12월 13일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나는 책을 가까이했다. 시간만 나면 책을 보는 나를 대학공부쯤 하다가온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책을 읽는 것만큼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1979년 5월 29일(화) 자 《전우신문》에 '참된 군인이되자'라는 제하의 글을, 그리고 1980년 4월 19일(토) <전우신문>에 '일기를 쓰는 보람'을 썼다. 이에 군부대의 사기가 달아올라 국군방송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참된 군인이 되자'라는 글은 장병문예 현상공모에 장려상으로 뽑혀, 육군 준장의 장려상 메달과 고급 만년필을 받았다. 당시 내가 쓴 글 중 기억에 남는 글이 있다.
 
“군인은 용서를 받을 수는 없어도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한다. 그리곤 그에 대한 벌을 받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용서받기보다 남을 용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철학적 사유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이 혼탁한 게 기성세대의 잘못이라면 나도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잘못이 있다는 황필호 교수님의 말씀처럼 사회를 위한 따뜻한 시선이 아쉬운 요즘이다.
 
나는 평생 남을 관대하게 여기고, 타인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해도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왔다. 고등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 다닐 수 없었기에 공부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그렇게 희망을 선택했다. 절망을 희망으로 만드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자신과의 약속
 
군 복무를 마친 추운 겨울날, 전화국에 다니는 이웃 아저씨에게 어머님은 나의 취직을 부탁했다.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알바)이었지만 감사한 마음에 노량진전화국에 나갔다. 전화국 전람계에 속해 일을 하면서 '우체국 집배원 모집' 광고를 접했다. 그냥 치러보기로 한 시험에 덜컥 합격했다. 하지만 공무원 임용 발령 통지서 절차가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1982년 전화국이 공사화(한국전기통신공사)가 되면서 비정규직이었던 나는 전화국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부흥개발이라는 전화 가설업체 일을 시작했다. 일당 8,000원으로 첫 봉급을 받아 녹음기를 샀던 기억이 난다.
 
일을 하던 중 서부서울우체국(현 은평우체국)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부흥개발 현장 소장님께 얘기했더니 일당을 올려 주겠다며 날 붙잡았다. 하지만 풍족한 임금보다 안정적인 공무원의 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는 6월 11일 서부서울우체국에 첫 출근을 했다. 모두가 대선배님들이어서 처음엔 기가 죽었지만,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1983년 봄, 서울역 앞 중앙사회복지관에서 검정고시 준비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주위 직장동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공부하겠다는데 못 하게 말리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고, 주위에서는 나의 공부를 허락하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업무를 마친 나는 서울역 앞 남대문경찰서를 지나 골목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교재만 자부담이고 모든 수업료가 면제된다는 바로 그 야학이었다. 선생님들은 직장인이거나 대학생들로,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각 과목 담임을 맡아 가르쳐 주었다. 외근하느라 파김치가 되어도 졸음을 참아가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이른 새벽부터 남산도서관으로 향했다. 피곤하면 커피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싸가지고 온 도시락 두 개로 번갈아가며 시장기를 메웠다. 그렇게 나는 2년 만에 검정고시 합격증을 거머쥐었다(1985년 5월 15일).
 
검정고시 합격이 목표가 아니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다시 허리끈을 졸라맸다. 종로 고려학원 문을 두드렸다. 학력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열심히 외근하고 밤엔 종로학원으로 달려갔다. 공부에 열의가 높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장학증(한 달 수강료 면제)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었다. 학력고사 3개월을 앞두고 어머니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이불과 베개 등 몇가지 살림살이를 싸들고 직장 인근 독서실에 둥지를 틀었다. 주간에는 우편물을 배달하고 곧장 종로 고려학원으로 향했다. 아침과 저녁식사는 지정 식당(서대문경찰서 옆 골목, 평양집)에서 했다. 학원을 마치고 독서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아침 출근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으로 나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력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나는 일주일만 휴가를 달라고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가 휴가를 내면 다른 분들의 수고가 뒤따라야 했는데, 그동안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동료들은 흔쾌히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지금도 동료들의 성원과 격려에 감사한 마음가지고 있다.
 
나는 휴가를 얻어 사직동 도서관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공부했고, 일주일 뒤 학력고사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명지전문대 행정학과에 합격했다. 목표는 사범대와 교육대였지만 직장을 다녀야 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결국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냈다.
 
꿈을 가진 사람
 
대학 입학 후 5월에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10킬로미터 마라톤에 참가하게 되었다. 개교 12주년 체육대회였는데, 공교롭게 12위를 해 행운상과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스스로 노력해 들어간 학교였기에 모든 순간이 소중했고, 아쉬운 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갔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친 일상은 허전했지만, 계속 공부하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1989년 3월 10일, 운명의 그녀를 처음 만나 일주일에 두 번 만나다시피해 1989년 5월 21일 결혼했다. 지금 슬하에 90년생(31세), 91년생(30세) 두 딸아이가 있다. 생활이 조금 안정된 나는 1990년도 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편입했지만, 출석 수업의 불가능으로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다.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기로 했고, '내 인생의 공부'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전시회나 뮤지컬 등을 접하며 문화체험을 하고 철학 서적과 에세이집, 프로이트, 순수이성비판, 사서(논어, 맹자, 대학,중용), 명심보감 등을 읽고 공부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학교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늘 일기를 쓰며 나의 성장 과정을 담았고, 조간신문에 45년 동안 각종 투고와 기고문으로 발표의 기회를 넓혀나갔다.
 
한순간도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던 나는, 1991년 교통방송 개국과 더불어 교통방송 통신원으로 교통제보는 물론 교통 시설에 대한 제안을 서울지방경찰청에 건의했고, 이에 횡단보도 신호등을 세 곳이나 설치했다. 통신원들 모임을 하며 자가 통신원과 수해 지역(고양지역) 봉사활동을 했고, 소망의 집(마천동에서 하남으로 이전)도 정기적으로 다니며 나눔을 행했다. 삶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1994년부터 헌혈을 시작해 지속적인 헌혈로 각종 인터뷰의 주인공이 되었고, 현재 헌혈은 140여 회에 이른다.
 

1994년부터 헌혈나눔. 현재 150여 회에 이른다
 

 
2000년 봄에는 경주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는데, 3~4개월을 준비했지만 18킬로미터에서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2000년 3월 5일 서울마라톤대회 하프코스 완주(2시간 2분 55초), 3월 19일 동아서울국제마파톤마스터스대회 하프코스 완주 (2시간 37분 53초), 그 외 경향마라톤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마라톤은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고, 나는 마라톤을 하며 불굴의 투지를 배웠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누가 대신해 살아 줄 수 없기에 우리는 늘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한다.
 

2023 년 5월부터 시작된 서울둘레길 완주 도전, 10월에 완주

 
 
2009년부터 서울시청 《하이 서울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하며 활동 범위를 넓혔는데, 나의 닉네임은 '꿈을 가진 사람'이다. 어디에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 스스로의 삶에 의해 결정지은 철학적 닉네임이다.
 
어릴 적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공부했다. 그때는 책상이 있었으면 하는 꿈이 있었고, 책상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뒤이어 책장이 있는 나만의 공간을 꿈꿨다. 지금의 나는 책장이 있는 책상에 컴퓨터를 올리고 나만의 공간에서 글을 쓰고 있다. 어릴 적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럼에도 나는 새로운 꿈을 또 꾼다. 욕심을 버리는 꿈,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꿈을.
 
내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니, 곁에서 격려해 준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스스로 일어난 결과가 아닌 것이다.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건 내 곁의 수많은 사람이었다. 나를 절벽 가까이 불러 주고, 절벽에 선 나를 응원해 준 사람들, 돌아보니 어느새 나의 등 뒤에는 날개가 자라나 있다. 하지만 나는 더 크고 단단한 날개를 위해 계속해서 꿈을 꿀 것이다. 가보지 못한 새로운 하늘을 향해 마음껏 날 수 있을 때까지.
 
출처 : 포기하지 않은 배움 꿈을 이룬 18인의 인생노트/ 강준오외 17인(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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