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98

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아일랜드의 초원을 바라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성한 푸르름이 그랬고 텅 빈 쓸쓸함이 그랬다. 그 들판은 천하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비바람을 견디며 풀들은 이리 눕고 저리 누웠다. 초원은 마치 바닷 물결 같았다. 나를 태운 자동차는 푸른 지평선을 가로지르듯 나아갔다. 한 자라도 대지의 맨살이 드러난 곳은 없었다. 경이로운 녹색의 향연이다. 풍경이 흘러와 마음에 스며든 한나절, 낯선 자연은 그렇게 내 몸속에 가두어졌다. 길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 내가 그 길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지나온 모든 위치가 무효인 듯 황홀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철학 2021.11.06

놀이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 놀이란 무엇일까요? 놀이는 다양한 말로 정의될 수 있을 겁니다. 놀이를 정의한다는 건 농담을 정의 한다는 것과 같아서 매우 부질없다는 글도 본 적 있는데요. 저라면 ‘놀이를 생산적인 결과물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로 간단히 정의해보겠습니다. 옥스퍼드 사전을 살펴보니, ‘특별한 생산적인 목적 없이 우리가 시간을 즐기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정의돼 있더군요. 놀이는 매우 보편 적인 행동입니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그림에도 노는 모습이 담겨 있죠. 사람뿐 아니라 개나 고양이도 잘 놀고요. 종을 뛰어넘어 같이 놀기도 합니다. 심지어 개미들조차도 특별한 목적 없이 자기들끼리 혹은 혼자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목격되곤 해요. 그런 점에서 놀이는 종을 넘어선 보편 적..

철학 2021.09.12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프라하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인 체코의 수도입니다. 프라하는 낮에 보면 활기찬 분위기라서 놀이동산의 한모퉁이에 와 있는 느낌을 줘요. 도시가 오래되었지만, 관광객들의 밝은 움직임이 도시 전체를 통통 튀게 만들죠. 활짝 열린 3층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방구석 음악회 같은 연주도 많아서, 공기 중에 음표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즐겁습니다. 서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에 시달리다가 동유럽에서 만나는 친근한 가격표들을 보면서 이런 느낌이 더 배가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밤에 보는 프라하는 모습이 확 바뀐 여성이랄까요. 낮에는 멜빵바지를 입은 명랑한 말괄량이 아가씨가 밤이 되자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고 파티에 참석해 아름다움을 뽐내는 느낌입니다...

철학 2021.07.04

시간

시간 아리스토델레스 이래로 줄곧 많은 철학자들은 시간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작 뉴턴(1642년~1727년)의 연구가 나온 후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개개의 '시간들'이 있다는 말이다. 철학자들에게 특정시간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은 그 사건이 시간의 부분 또는 시간의 단위를 채웠음을 의미한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년~1716년)는 뉴턴과 다른 관점을 내놓았다. 라이프니츠는 사건들이 서로 동시에 일어나거나 전후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시간이란 단지 우리가 그 관계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방식이지 그 관계를 구성하는 것과 구성하는 것과 구별되는 별도의 것이 아니라고 봤다. 라이프니츠의 주장과 반대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년~..

철학 2021.01.13

니체의 영원회귀

니체의 영원회귀 니체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는 단연 운명애(아모르파티 amor fati) 와 영원회귀다. 두 개념은 서로 다른 저서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따로 떨어뜨려 이해할 수 없다. 운명애와 영원회귀는 하나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지상명령과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이어져 있다는 건지 말하려면 일단 애처롭고 창피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니체의 사랑 이야기부터 해야만 한다. 니체와 그의 친구 레,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루 살로메 이야기다. 니체는 문헌학계의 스타로 출발했지만, 철학자로 변모한 뒤 주로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된다. 초기 철학은 대부분 쇼펜하우어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삶은 고통이다. 빠져나올 방법이 없는 고통이다. 칸트가 물자체라 불렀고 쇼..

철학 2020.12.19

내가 나비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인가

내가 나비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인가 옛날 중국에 장자라 불리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어요. 그는 초나라 위왕의 궁전에서 세금을 걷는 일을 맡고 있었죠.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문 앞 복도에 있는 의자에 잠시 앉았어요. 장자는 곧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어요.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어요. 나비는 길을 따라 내리찍는 따뜻한 햇볕 속에서 우아하게 날개를 펼럭이며 행복해했어요. 그러다 보라색 연꽃잎에 살포시 내려앉았어요. 원반 모양의 밝은 노란색 암술에 머리를 파묻고 연꽃 깊숙이 저장된 꿀을 빨아 마셨어요. 충분히 배를 채운 나비는 휠휠 날아갔어요. 잠에서 깬 장자는 혼란스러웠어요. 꿈에서 깨고 나니 자신은 나비가 아닌 장자였어요.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 꿈을 꾼 것인지 ..

철학 2020.11.30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 어떤 글의 초고를 수정하면서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글 속의 어느 인물을 ‘대상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인물을 글의 전개를 위해 소모했을 뿐, 정작 깊이 연구하지 않았고 큰 관심도 없었다. 그런 ‘대상화’는 내가 실제 세계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대상화’를 많이 극복했거나 주의 깊게 피해간다고 내심 자신하고 있었다. 그건 오만이었다 ‘대상화’라는 알쏭달쏭한 말은 무슨 뜻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어떠한 존재를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 말이 사용된 예들을 살펴보면, “인격적인 존재에서 인격적인 부분을 박탈하여 물건처럼 다루며, 대상화하는 대상을 자신과 달리 자율성과 자기결정..

철학 2020.10.23

무아(無我)=무자성(無自性)=공(空)

무아(無我)=무자성(無自性)=공(空) 무아를 알면 자유가 보인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글자 그대로 풀면 '모든 법에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서 '법(法)'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를 번역한 한자어인데, 불교에서 다르마는 쉽게 말해 '우리가 구별해서 지각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결국 ‘제법(諸法)’은 지각되는 외부 대상이나 생각되는 관념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문제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의 ‘무아(無我)’ 라는 단어다. 무아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anaman)'을 번역한 한자어다. '아나트만'이라는 개념은 부정을 뜻하는 '아a'와 영원불멸한 본질이나 실체를 가리키는 '아트만úaman'이 합쳐져 만들어..

철학 2020.08.07

비움의 가치

비움의 가치 동양 문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비움'이다. 인류 역사 최초로 숫자 '0'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은 인도인들이다. 서양에서는 '0'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세상은 신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진공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은 비움 즉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데,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에 비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0'이라는 개념은 무신론으로 여겼고, 이는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0'을 거부한 반면 인도인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0'을 쉽게 받아들였다. 인도의 힌두교는 우주가 무 에서 생겨났고 그 크기가 무한하다고 믿는다. 인도인에게 '0'은 창조이자 동시에 파괴이기도 했다. 그들이 믿는 시바 신은 무 자체다. ..

철학 2020.07.13

마음으로 사는 ‘인간적 시간’

마음으로 사는 ‘인간적 시간’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로 불리는 성(聖)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그의 저서『고백록』에서 시간을 우리가 달력이나 시계로 잴 수 있는 물리적 시간과 마음으로 잴 수 있는 인간적 시간으로 구분했다. 그가 말하는 마음이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인데, 인간의 영혼은 물리적 시간 안에서 살지 않고, 인간적 시간 곧 마음의 시간 안에서 산다고 생각했다. 물리적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자꾸만 흘러가는 시간이고 이 시간에서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고,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려서 없기 때문에 오직 현재만 존재한다. 철학에서는 이런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부른다. 모든 물질은 이 시간 안에 놓여 있고 사람의 육체도 물질인 만큼..

철학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