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시간에 대한 단상

송담(松潭) 2019. 12. 24. 22:48

 

시간에 대한 단상

 

 

[송두율 칼럼]시간에 대한 단상

 

 

 

 쇼펜하우어는, 시간은 그 자체의 힘으로 스스로를 보여줄 수 없고 단지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움직이는 어떤 다른 것에 의거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을 따라 울렸던 교회의 종소리는 신의 섭리를 담고 있는 영원한 시간을 상기시켰다.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이에 따라 우리 삶을 합리적으로 꾸릴 수 있다는 믿음은 르네상스 시기에 북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시계와 함께 뿌리를 내렸다. 장소나 날씨에 제약받지 않는 시계는 인간 스스로가 펼치는 복잡한 속세의 항시적인 동반자가 되었으며 일상생활의 총체적인 관리자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간접적으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의 이러한 속성은 동시에 시간을 개인의 삶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가진 개인들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개인이 지녔거나 또는 지닐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하거나 포기해야만 한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 받았던 학교생활 시간표는 우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시간에 관한 첫 경험일 것이다. 이같이 시간이 누리는 상대적인 독립성에 주목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시간도 자본이나 문화와 같은 개념처럼 변화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회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시간이라는 것이다

 

(...생략...)

 

 시간이 보여주는 이 같은 사회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역시 개인의 삶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사회적 시간 안에서 살고 이에 의해서 통제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삶을 완전히 사회적 시간의 테두리 안에 가두려 하지는 않는다.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을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만든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나 통속적인시간성에 대해 본래적인시간성을 대비시킨 하이데거의 시간에 대한 실존철학적인 해명도 있다. 이는 사회적 시간만으로는 삶의 근원에 놓여 있는 시간의 비밀을 우리가 근본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는 논거들을 제시한다

 

 

 한 해를 마감하고 동시에 새해를 맞으며 모두들 시간에 쫓기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시간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을 때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무척 피곤해진 자신의 본래적인 시간을 찾기 위해 혼자서 아니면 가까운 몇 사람과 함께 조용히 산책길을 찾아 떠나는 신년산책이라는 풍습이 독일에는 있다. 사회적 시간이 어쩔 수 없이 몰고 오는 번잡과 소란, 또 이것이 남기고 간 허전함 속에서 자기의 본래적 시간을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2019.12.24 경향신문)

 

[송두율 칼럼]시간에 대한 단상

 

 

 

시간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가의 문제도 철학의 주된 연구 주제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흐른다."라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지금이 현재이다."라는 말은 언제 하든 상관없이 항상 참이다. 다시 말해, 현재는 우리가 있는 시간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우리가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철학자들에게 시간은 흐르는 것이 맞다. 일부의 시간이 과거이고, 그 다음은 현재이며, 나중이 미래가 되는 것이다.

 

 

 ‘지금여기와 같은 개념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여기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라고 말하는 시간에 우리가 서 있는 장소를 말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철학자들에게는 우리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지도 않는다. 시간은 그저 공간처럼 여러 부분들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런 시간의 한 부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일부분이 바로 현재인 것이다. 우리가 있는 물리적 공간이 "여기'인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시간,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공룡, 원시인, 도도새가 단지 우리가 존재하는 같은 공간에 없을 뿐이지 모두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S 키더 · 노아 D. 오펜하임 지음, 허성심 옮김 /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365’중에서

 

마음운동

 

 마음의 체력이 약해지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는다.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평소에 알던 내가 아닌 것 같아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럴 때 마음의 근력은 유연한 태도를 갖게 해준다.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도와준다. 마음의 지구력은 힘든 일이 있을 때 특히 빛을 발한다. 어떻게든 나를 일상에 붙들어 매주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 발 또 한 발 내딛게 해주는 것도 마음의 지구력이다.

 

 섭섭함은 으레 관계에서 비롯하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크기와 무게를 재기 때문이다. 섭섭하다는 것은 모자라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자람을 판단하는 건 전적으로 마음의 소관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마음에 금이 가게 할 수도 있지만, 결정(結晶)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함은 분함이나 노여움에 가닿기도 한다. 얼어붙은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을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제어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마음은 뭉게뭉게 치밀어 나를 억누르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않고 무게도 없는 어떤 것이 나를 뭉갤 수도 있다. 마음은 재화가 아니다. 매번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교환하는 게 불가능하다. 상대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도, 섭섭함을 메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골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섭섭함을 받아들이는 순순함이다. 언제 어디서든 섭섭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마음운동의 마지막 단계에는 단단한 자아가 있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저문다는 것은 해가 져서 어두워짐을 뜻한다. 어두워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불과 빛, 그리고 불빛의 귀함을 깨닫는다. 상실감에 휩싸였을 때, 있었던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였는지 알아차리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이 아플 때,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마음이 경직되었을 때, 마음에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아무래도 마음운동을 해야겠다

 

 오은(시인) 칼럼 마음운동중에서

 (2019.12.24 경향신문)

 

[직설]마음운동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병으로 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불교의 경전 보왕삼매경(寶王三昧經)’의 첫 구절이다.

 

 이 삼매경은 같은 운율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의 번잡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보답을 바라지 마라,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했다고 밝히려고 하지 마라.

 

 바라지 마라. 행복에 대한 소망은 화를 부르니, 인생고를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라는 뜻이다.

 

 섣달그믐날 자정 1초 뒤에 갑자기 다른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닌데, “희망찬 새해가 난무하는 때가 왔다. 희망을 갖자, 희망을 달라, 희망이 있어야 살지. 나는 희망을 숭배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희망, 소망, 원망(願望). 모든 바람은 실상, 원망(怨望)이 되기 쉽다. 바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실제도 인식도 판단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과 희망이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 희망 달성 이후 더 높은 희망, 과제, 욕망이 생긴다. 여기서 우리는 진짜 불행에 포획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욕망과 희망은 어감의 차이가 커 보이지만, 희망은 욕망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희망 고문이 가장 쉬운 예다. 기대가 클수록 만족보다는 부담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의 번뇌는 애증이 아니라 지속되는 부담에서 온다. 그래서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만족이다.

 

 “새해 모든 이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연말 즈음 또 하나의 재앙 담론이다. 건강, , 취직, 국회의원 당선사람들의 소망은 비슷하다. 점입가경, 소망을 대의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지옥인 이유는 모든 이들이, 자기 소망을 동시 달성하려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의미 없는 대립이 계속된다. 바로 올해처럼.

 

* 정희진(여성학자) 칼럼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2019.12.25. 경향신문)에서 부분적으로 발췌.

 

[정희진의 낯선 사이]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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