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
소피스트가 논술 학원의 인기 강사였다면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소피스트와 달리 돈을 받지 않고 말했으며, 논증의 기술을 연마하기보다는 논리의 정합성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자만심과 자아도취를 버리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살라고 했으며, 신의 가호가 아니라 이성의 힘에 의지해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말했다.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대중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았다. 다만 질문을 던져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대화가 진리를 찾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글을 일절 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명성과 인기는 펠로폰네소스전쟁이 한창이던 B.C.420년 무렵 절정을 이루었다. 다른 사람들이 신을 섬기거나 물질을 탐하는 데 열정을 쏟을 때 그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탐색했고, 그처럼 남다른 태도가 그리스 세계의 청년들을 아테네로 불러 모았다.
그런데 그가 던진 질문이 민주주의와 충돌을 일으켰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선과 미덕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전쟁의 참화로 인해 사람들의 심성이 사나워질수록 그 충돌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통념을 흔드는 질문을 던졌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유란 ‘폴리스의 자유’ 또는 '집단의 자유'였다. 자신들이 페르시아나 다른 도시국가에 지배당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인권, 평등 같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도 노예제와 성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천착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서 도덕법을 끌어내려 했다.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만인이 똑같이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자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인격적 이념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인기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연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교활한 개자식'이라고 비난했다.
소크라테스만 박해받은 건 아니었다. '태양은 신이 아니라 불타는 돌덩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민회가 천문학을 '신성모독의 학문'으로 규정하는 결정을 내리자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아테네를 떠났다. 신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고 했다는 이유로 민회는 프로타고라스의 책을 불태우고 도시에서 추방했다. 분서(焚書)‘는 진시황이나 히틀러 같은 개인독재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무지하고 변덕스러운 대중이 독재자와 다름없는 야만 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종교적 독단이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고정관념 위에서 일부 계급만 주권을 나눠 가지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일지라도 장기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아테네의 역사는 증명해 보였다. 아테네 시민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지속 가능한 민주정의 불가결한 조건인데, 호모 사피엔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조건을 완비하지 못했다. 어찌 아테네 시민을 욕하겠는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衆愚政治)의 증상을 드러내고 있던 BC405년. 예고된 재난이 아테네를 덮쳤다. 스파르타 해군이 아테네 함선 180척을 궤멸한 후 물샐틈없이 도시를 포위하자 모든 동맹국이 등을 돌렸다. 스파르타가 제시한 항복 조건에는 민주정의 폐지가 들어 있었다. 참주제를 도입했다. 시민들은 민회를 열어 민주정을 폐지하고 30인 참주제를 도입했다. 스파르타의 앞잡이가 된 30인 참주는 한 해 동안에만 1만 명 넘는 시민을 죽였다. 한때 노예를 포함해 30만 명이나 되었던 아테네 인구는 6만 명으로 오그라들었다.
참다못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참주정을 전복하고 민주정을 회복했다. 그런데 그 직후 아테네의 젊은 시민 세 사람이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혐의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B.C399년 5월, 소크라테스는 프닉스 언덕 강당의 종교 법정에 섰다. 500명의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는 첫 번째 투표에서 근소한 표 차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에게 아첨하거나 동정심에 호소하지 않고 냉정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배심원들은 사면 여부를 결정하는 두 번째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사면을 거부했다. 잘난 척 하는 듯 보인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그들을 불쾌하게 한 것이다.
델로스 축전 순례 행사 때문에 사형 집행이 연기되었던 한 달 동안 소크라테스는 법정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징되는 감옥에 갇혔다. 제자와 친구들이 탈출 계획을 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나갈 수 있었는데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 당근즙을 마셨다. 그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오래된 가짜 뉴스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뿐이다. "폴리스가 정당한 절차에 따라 내린 결정이 옮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옳은가? 모두가 그렇게 할 경우 폴리스가 존속할 수 있는가?"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장과 쇠락과 죽음, 그리고 일시적 부활을 모두 겪었던 소크라테스는 독 당근즙을 마시는 행위로 자신이 던진 철학적 질문에 대답했다.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 죽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잠재력과 한계를 모두 확인해 주었다. 아테네의 품에서 태어났으나 시대의 경계 너머로 나아갔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은 다수의 폭정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문명의 대세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의 역설이다.
유시민 / ‘유럽 도시기행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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