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얼굴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 프랑스 철학자 )가 말하는 ‘타자(他者)’는 글자 그대로 자신 이외의 사람이 아니라 ‘소통이 안 되는 사람,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해부학자 요로 다케시 교수가 쓴 『바보의 벽』이라는 책이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던 적이 있는데, 레비나스의 타자를 알기 쉽게 표현하면 바로 ‘바보의 벽이 가로막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할 수 있겠다. 레비나스가 남긴 문헌은 어느 것이나 극히 난해 한데 책을 읽어 보면 타자라는 개념을 아무래도 사람이외의 개념으로도 확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듯하지만, 정확히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철학 연구자도 아닌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이 레비나스의 문헌에서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우선은 알기 쉽게 타자를 ‘좀처럼 알 수 없는 상대’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타자론’이 철학의 중요한 논점으로 부상한 것에는 필연성이 있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고찰하는 행위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넣으며 고찰을 거듭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것이다!’라고 확정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답은 명백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답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제안과 부정이 되풀이되고 영원히 완전한 합의에 다다르지 못할 것 같은 이 행위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라는 존재의 부상과 연결된다. 이렇게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타인’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레비나스는 끊임없이 타자의 중요성과가능성에 대해 논했다. 서먹한 상대, 소통이 안 되는 타자가 왜 중요한 것일까?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간단히 답했다. “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다”
자기 시점에서 세상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타자에 의한 세상의 이해와는 다르다. 물론 타자의 견해를 ‘네 생각은 틀렸어’라며 부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류에게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야기되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타자를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관점의 가치관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레비나스가 주장한 '타자'의 개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북한이나 이슬람국가 등 대화 자체가 어려운 국가들 간의 관계성이 바로 떠오르고 대화 불가로 서로 의견을 나누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계속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야마구치 슈(김윤경 옮김)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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