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로 미리 달려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세상에 수많은 것이 있다. 여름 과일 수박, 가을의 코스모스, 산책로의 이름 없는 들꽃, 나의 친구 같은 반려견 산초,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일컬어 ‘존재자(Serdes)’라고 한다. 세월이라는 역사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는 마을 앞 느티나무, 출퇴근이나 산책길에 호흡을 같이하는 나의 반려견 산초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묻지 않는 존재이다. 산초의 눈은 울기도, 웃기도, 미안해하기도, 때론 뿌듯해하기도 함을 자주 드러냄으로써 나보다 더 풍성한 감정적 존재임을 알려주는 듯하지만, 산초가 자기 자신에 대해 묻는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동물학과 자연학이 발전했고 종우월주의에 대한 비판도 이제 오래된 것이 되어버렸지만, 인간만이 자기 존재의미를 묻고, 분석하고 대답하려 한다는 점은 아직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이 점에 주목했고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존재인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저 사람은 막 사는 사람이야, 도대체 고민이라는 것도 없고, 생각도 없지’라고 지적받는 사람이나 자동 반응 기계처럼 지극히 즉물적인 사람은 현존재로 보기 어렵다. 자기존재의 의미를 전혀 묻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를 천착하는 현존재는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라고 불렀다. 세계 내 존재로서 현존재는 ‘던져진 존재’이다. 던져졌다는 것은 자발적이지 않다는 것, 피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를 자유롭게 선택해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이렇듯이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자연적 우연성의 산물이며 동시에 사회적 우연성을 운명처럼 안고 산다.
한국 사회에 태어났고 그것도 베이비붐 시대가 아니라 IMF 시대에, 또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인공지능시대에 태어나고 그러한 사회구조적 영향 아래 살아가게 되는 것이 사회적 우연성인데 인간은 사회적 우연성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던져진 존재의 우발성이 우리의 자연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수록 우리는 더 울기도 더 웃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자기 존재와 직면하지 않고 그것을 피해 사는 사람, 평범한 일상에 빠져 의미를 묻지 않고 사는 사람을 ‘다스만’이라고 부른다. 그가 말하는 다스만은 도구로서의 용도를 가진 사물의 세계에 빠져 사는 평균적 일상인(현존재)을 말한다.
스마트폰에 빠져 살거나 식도락에 빠져 사는 사람, 오늘은 누구하고 무엇을 하고 놀까에 몰두하는 사람, 최신의 유행을 쫓아 사는 시람, '남들도 다 하는데 나도 해야지'라는 생각과 행동을 일관되게 이어 가는 사람이 다름 아닌 다스만이다.
이들은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적 다수’로 존재한다. 다스만이 익명적인 이유는 남들이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고 화낼 때 화내며 그들 속에 그들로서 있기 때문이다. 다스만은 자아는 있으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평균적인 의식과 행동양식을 갖고 다수적 존재로 살아간다. ‘일상의 위대함’, ‘평균적 삶의 행복감’ 속에 감춰진 존재의 망각을 들추어내는 개념이 다스만이다.
현존재의 근원적 불안에 대응하는 다스만의 방식으로 불안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럴 수 없다. 다스만의 방식은 일시적인 망각술에 지나지 않는다. 다스만의 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회심도 근본적인 출발점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 동인이 내적이지 않고 일상적 삶의 피로감의 누적이라는 외적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어떤 처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처방이 정말 우리 현존재를 실존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좀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나 하이데거의 처방은 ‘죽음에의 선구(Vorlaufen zum Tode)’, ‘죽음에로 앞당겨 달려감’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환생, 영원한 삶은 인류의 오랜 꿈이지 않은가. 죽음의 공포가 종교를 낳고 의학과 대체의학의 발전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게놈 프로젝트는 죽음을 이겨내려는 전 인류적 차원의 거대한 계획이 아니었나.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죽음의 선취라니?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왜 하이데거는 죽음에로 미리 앞서 달려가 보라고 말하는 것일까. 내가 죽음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10년 혹은 20년 후 나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해보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의 흔적을 남긴 채, 어떤 죽음으로 타자에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죽음의 순간에 내가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생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의 미래의 죽음 사건이 현존재인 나의 세계와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하이데거는 미래의 죽음 사건이 ‘지금, 여기’의 존재로서 현존재의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재구성하도록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죽음에의 선구가 본래적 자기에로의 결단을 실행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죽음에의 선구를 실존의 열쇠로 보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의 선구는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미리 자기 죽음과 직면해보는 중요한 실존의 사건이다. 자기 삶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규정하는 위와 같은 실존적 사건을 내적으로 감행할 때, 지금과 다른 삶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제 던져진 존재에서 스스로 자신을 던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기 삶의 온전한 기획자, 디자이너가 탄생하는 것이다.
< 2 >
운명이여, 너는 어디로 가느냐!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Sophkles)는 당대의 최고 슈퍼스타였다. 아테네 민주주의 완성자인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동료로서, 100여 편의 비극을 쓴 최고의 작가로서, 사교성과 절제미를 갖춘 멋진 사람으로서 손꼽히는 재력가로서 그는 아테네 사회에서 존재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단순히 오이디푸스 가문의 운명(moirai)적인 비극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우리는 작품에서 오이디푸스의 삶에 대한 투쟁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으며 그 삶의 실존적 의미를 탐색할 수 있다. 당대 그리스인들에게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이디푸스 왕》은 실존 문학의 시원이라 할 만하다.
작품 내용은 간단하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자신과 아내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손에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이오카스테는 말한다.
왕과 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손에 왕께서 살해당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 그 아들이 태어난 지 겨우 사흘밖에 안 되었을 때, 왕께서는 그 아들의 두 발꿈치를 뚫고 그것을 한데 엮어서 사람을 시켜 인적이 없는 산(키타이론) 속에 버렸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와 왕비 메르페의 손에 자라게 된다. 그리고 훗날 우연한 사건으로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게 되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테베의 왕이 되었고 슬하에 자식들을 두었다. 오이디푸스는 곧 자신이 살해자임을 알게 된다. 그는 “칼을 달라. 아내이면서 아내가 아니고, 자기와 자기 애를 함께 낳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미친 듯 외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왕비는 목을 매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살아가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한탄했다.
아, 슬프다. 재앙의 이 몸! 나는 어디로 가나? 내 목소리가 지향(방향) 없이 날아가나니. 아아, 내 운명이여, 너는 어디로 가냐?
오이디푸스는 실존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신탁에 순응하지 않았다. 운명의 바퀴 밖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며, 스스로 자기만의 운명의 바퀴를 굴리려 했다.
이 엄청난 파국을 감지하면서도 오이디푸스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운명의 여신 앞에 나아가 또 다른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아테네적 내세관에 저항하는 상징적 인물이며, 지금 여기 펼쳐지는 운명 앞에서 현재의 삶을 만들려 분투하는 인간의 표상이다. 흑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치자. 우리가 그것을 안다면 대개는 절망하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운명의 행로를 모를 때 우리는 희망을 품고 무엇인가를 앞으로 밀고 가지 않을까?’라고. 프로메테우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통해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운명의 거대한 힘이란 그야말로 '인간이 알 수 없다'는 데서 나온다. 아테네인들은 그들의 신들마저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최고의 신, 신 중의 신인 제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승자를 알기 위해 황금 저울을 사용하는 모습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신탁으로부터 운명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맞서 싸웠다라고 생각하는 이는 비극적 운명 앞에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오이디푸스가 우리들의 오이디푸스가 될 수 있는 것은 막연한 희망이나 맹목적인 바람이 아니라 실존을 위한 의지와 용기, 그리고 최종적인 답을 찾아내려는 과감하고 치밀한 행위 때문이다.
< 3 >
자기 서사의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 비트겐슈타인 이전과 이후, 우리의 개별 이성이 활동을 한 이래로 우리는 의식적이든 생애사적 감각에서든 삶, 삶의 의미. 실존의 진실을 물어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는 점점 물음을 던지기 힘들어지고 있고, 물음을 던지는 일에 지쳐가고 있다. 우리에겐 고독할 시간도, 질문을 던질 시간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니체의 표현처럼 정든 고향의 호숫가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는 결단을 해야 할 만큼 존재론적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적 시간의 속도를 쫓아가는 데도 버겁기 때문이다.
왜소해진 인간의 소외는 넓고 깊고 크다. 시간을 내서 친구를 만나려 하면 그 친구는 어제의 나처럼 바쁘고 어렵사리 만나 나눈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들은 허공을 떠도는 낱말들의 조합이다. 나를 소진하고 서로를 소비한 만남에서 의미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회사원, 부모. 배우자, 학생, 아들딸이라는 역할 놀이가 종종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눈물과 웃음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때론 자동 역할 기계 노릇 같기도 하다. 'So ist das Leben(그것이 인생이다)'이라고 누군가 잊지 않고 말을 던진다.
사랑의 불꽃이 잠시 우리를 신선하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무와 배려의 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가끔 사랑의 위대함을 기억해내려 우리는 노력한다. 뫼르소의 시간, 기계적인 리듬에 묻혀 사는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것을 열심히 산 징표라고 위안해주는 이도 있지만, 그건 자기기만의 생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그저 모호한 편안함을 즐기라는 거짓 평화의 말일지 모른다. 무감각과 달콤한 자기기만이라는 이상한 변증 놀이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전에, 나의 언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지금 여기'라는 실존의 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 자기 응시, 질문, 탐구, 결단, 자기 파괴와 창조, 탈주의 미덕이다. 그 미덕의 크기가 우리 존재를 확장시키고 삶의 의미와 자기 창조의 재미를 만들어 갈 것이다. 탈주의 자유와 바람을 일으키고 삶의 희열을 폭발시킬 것이다.
자기 서사를 써내려가는 삶의 예술가는 의사처럼 무언가를 약속하지 않는다. 자기 서사는 과정의 연속이고 시도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정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 발을 내딛는 순간, 자기 서사가 시작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처럼 늘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자기 서사의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하준 / ‘실존주의자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묻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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