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조리’와 함께 살아간다
‘부조리(L'Absurde)’에 대한 논의는 《시지프 신화》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부조리와 함께 살아간다. 그 어떤 인간도 삶의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부조리가 인간 실존의 근원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에서 부조리는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다. 부조리는 자기 모순적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을 지시하는 말이 아니라 실존의 사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설명될 수 없거나 증명될 수 없는 성격의 존재 사건, 삶의 이율배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에 관련된 판단이며 그것에 대한 현상학적 개념이다.
하지만 카뮈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부조리는 철학이나 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는 일종의 감정이다. 부조리는 불확실하고 모호하며 분명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정서로서, 특정한 인생의 길목과 어떤 실존적 상황에서 불현듯 마주치게 되는 실존적 사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왜 인간인 우리는 부조리한 감정에 직면하는가? 아니 직면할 수밖에 없는가? 카뮈는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의 사이의 절연”, 곧 다시 연결될 수 없는 깊고 완전한 단절 상황에서 부조리 감정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과 그의 삶에서 오는 절연의 내용은 먼저 자기 관계에서의 절연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기 존재에 대해 갖는 확신과 그것을 채우는 내용 사이의 틈을 메울 수 없다. 의미 지향과 의미 채움 사이에 틈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 틈에서 우리는 공허와 무력감을 느낀다.
나와 타자의 관계 역시 절연이다. 우리는 각자 목소리를 내지만 완전한 소통과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해와 오인 그리고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된다. 카뮈는 이를 두고 전화기를 들고 말하지만 무언극을 하는 것과 같은 꼴이라고 꼬집었다. 나와 타자는 이해와 공감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근본적으로 몸짓에 불과하다. 친근한 것 같지만, 이해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 우리는 서로에게 낯설음의 대상일 뿐이다. “난 널 이해해”, “우리는 소울 메이트야” 따위의 표현은 절연의 느낌에서 비롯된 강한 의미 부여의 시도 이상이 아닌 셈이다. 카뮈에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세계도 절연되어 있다. 세계 역시 인간에게 낯선 어떤 것이라고 그는 파악한다. 인간은 개념과 이론을 통해서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지적 욕구가 있지만, 침묵하는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단지 진실의 한 자락을 알고 있는, 그것도 확실한 것 같지 않은 느낌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세계는 여전히 두꺼운 벽으로 존재한다. 카뮈의 눈에 세계와의 일치나 화해를 쉽게 꿈꾸는 사람들은 나와 세계의 절연에서 연유하는 실존적 부조리의 사태를 망각함으로써 그저 언제나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비실존의 존재일 뿐이다.
부조리의 또 다른 출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대개 단순하게 살고 싶어 한다. 복잡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드물다. 고민의 시간보다 즐거움의 시간을 더 바라는 것이 우리와 인간의 특징이다. 그래서 인간은 때론 호모 루덴스로 살아가며 그로 인해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 가도 어느 날 문득,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진정 잘 살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욕구를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이때 우리는 어떤 기준과 가치를 갖고 삶을 살아도 결국엔 죽음이라는 절대적 조건, 죽음의 필연을 강렬하게 감지하게 된다. 이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삶의 규범의 공허함, 존재의 무력감을 명증하게 인식하게 된다. 카뮈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에게 강하게 말하고 싶어 했다.
무의미의 시간을 사는 무욕의 존재
부조리한 인간의 대명사가 《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이다. 선박회사에 다니는 30대의 남자 뫼르소는 의미 상실의 바다에서 방황하지만, 그것을 방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심리적 감각을 상실했고 규범에 무감각하다. 뫼르소는 무의미함을 공기와 같이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뫼르소는 자신의 엄마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양로원에 보냈으며, 엄마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사무적으로 장례식을 치른 후 여자친구와 섹스를 즐긴다. 그는 사랑하지 않지만 상대방이 결혼을 원하면 결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아랍인을 죽인 후에 정당방위를 주장하라는 변호사의 조언을 뿌리치고、‘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 한, 아니 감정을 잃어버린 존재의 이름이 뫼르소이다.
뫼르소에겐 생의 욕구도 없고, 형이상학적 욕구도 없다. 겉으로 보면 뫼르소는 무의미의 시간을 사는 무욕의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에 표피적으로 관계한다. 그에게 세계는 낯설 뿐이다. 세계와 분리된 존재가 뫼르소이며,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냐고 카뮈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반항과 자유와 열정
부조리로서 실존의 사태를 담담히 받아들일 것을 우리에게 권고한 카뮈는 ‘어떻게’ 실존할 것인가를 말한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반항, 자유, 열정이다. 반항은 의식적으로 운명에 도전하는 것을 말한다.
운명에 반항하는 인간의 전형이 바로 시지프이다. 그는 계속해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다시 꼭대기까지 굴려 올린다. 카뮈는 시지프와 같은 의식적인 반항이 실존의 일관적 태도가 되어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실존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부조리한 인간이 가져야 하는 또 다른 실존적 태도는 자유정신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는 환상을 먹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그러한 환상이 거짓이고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실존적 경험을 통해 직시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만든 행위의 원칙과 신념, 편견, 규범, 가족·사회 등의 감옥 속에 갇혀 산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카뮈는 실존이란 자유를 최대한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최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지거나 법률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전제로 한 선택과 투쟁의 산물이다.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선택은 자유가 아니다. 운명과 상황을 넘어서려는 삶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우리를 자유의 왕국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열정, 그것도 ‘불꽃같은 열정’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자기 자신의 발견,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창조의 열정이 불꽃같은 열정이다. 그것이 부조리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당신은 조선을 지키시오”라고 유진 초이가 말하기 이전에 고애신은 스스로 조선을 지키길 원했고 조선을 위해 불꽃이고자 했다. 고애신에게 불꽃같은 열정이란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곧 자신의 독립이었던 그에게 개별자로서 실존과 사회적 실존은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부조리를 안고 부조리에 맞서며
반항, 열정, 자유의 정신을 갖고 ‘신 밖에서’ 자기 입법적 방식으로 현존하는 인간이 바로 실존이라고 생각한 카뮈가 우리에게 내미는 인물이 《이방인》의 뫼르소였다. 도덕적 감각이 발달된 사람들은 파격을 넘어 반도덕적이라고 폄하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뫼르소일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첨예한 극단화를 감행하면서 뫼르소가 태양의 뜨거움 때문에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진술이 태양으로 상징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맞서 반항하고 대결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태양은 동시에 반항과 자유, 자기 삶을 창조하는 열정이라는 다른 상징성을 갖는다. 강제하는 것과 강제를 벗어나 반항, 자유, 열정을 갖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실존, 그것이 태양이다. 태양의 이중적 상징성처럼 생은 반항하기 어려운 거대한 괴물이며 생의 가능성, 다시 말해 실존은 반항할 수 없음에도 반항해야만 하는 데서 말할 수 있다.
시지프도 마찬가지다. 거부할 수 없는, 거부되지 않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바위를 다시 산 위로 굴리며 웃는 것이 시지프로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실존의 길이다. 혼자보다는 다 같이, 비판보다는 순응을, 자유보다는 획일을, 모험보다는 질서를 추구하는 삶이 현명한 삶이며 세계를 위한 삶이라고 친절하게 분장한 그 어떤 힘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며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거부할 수 있다. 적어도 몇 번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혹을 거부하다가도 우리는 종종 달콤한 사이렌의 마법과 같은 노래에 홀리고 싶고 언제 그 유혹의 목소리가 찾아올까 기다리기도 한다. ‘제발 나를 유혹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만 시지프의 고통이 그것을 튀어 나오게 만든다.
시지프가 바위 굴리기를 중단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그 순간 시지프는 안온하겠지만 그의 얼굴엔 웃음 대신 눈물이 흐를 것이다. 마지막 순간을 참아내지 못한 회한의 눈물은 안온함이 크면 클수록 더 크게 과거의 시간을 적시지 않겠는가!
뫼르소와 시지프에게, 카뮈에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실존의 본질적 사태인 부조리를 느끼고 인식하며, 부조리를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것, 동시에 자유정신을 갖고 그것에 열정적으로 반항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생의 한순간,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방법이며 자기 서사의 유일한 작법이다. 뫼르소처럼 시지프처럼이 아닌, ‘나, 뫼르소’, ‘나, 시지프’가 되는 것이다.
이하준 / ‘실존주의자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묻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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