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잉보인(以文仍輔仁)하는 친구가 그립다
밥집이나 술자리에서 갑자기 만나 나이를 따져 형님, 동생하여 친구가 되는 수가 있다. 이 사람들이 사회생활 잘 하는 편이다. '형님 동생'으로 연을 맺으면 금방 친해진다. 호칭이 주는 마력이다. 나도 얼떨결에 형님 동생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자칫 서먹할 관계가 형님 동생 하면서 급속도로 마음이 문이 열린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서로간의 인간성에 대한 검증을 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 저렇게 하는구나!'’ 하고 겪어 본다. 그러다가 돈이 걸리는 이해문제에 직면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고개를 잘 넘어가는 관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이해가 안 맞으면 헤어진다. 쉽게 친해진 사람은 돈 앞에서 쉽게 헤어지기 마련이다. 관계가 정리되고 헤어질 때 인간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그런가 보다 하지만 속으로 상처가 생긴다. 그렇게 결별을 몇 번 경험하다 보면 형님 동생 하며 친구 맺는 데에 신중해진다.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안동의 유서 깊은 양반집안 후손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상 깊은 대목이 ‘허교(許交)’라는 절차이다. ‘사귐을 허락한다’는 의미이다. 만나자마자 바로 친구관계로 진입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인품과 학문을 겪어 본 뒤에 본격적인 관계 맺기를 한다. 깐깐한 장치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기분 나쁜 절차일 수 있다. 허교 이후에는 말도 편하게 하고 속마음을 터놓는다. 선비라는 게 금방 친해졌다가 수 틀려서 또 금방 헤어지면 선비가 아니라고 생각한 증거이다.
나라 예산을 배분하는 노른자위 장관자리인 기획예산처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억대 연봉의 로펌으로 가지 않고, 안동 골짜기의 도산서원으로 내려간 인물이 김병일(73) 선생이다. 대학 다닐 때부터 퇴계 선생을 흠모해서 인생 말년에라도 퇴계 선생 가까이에 살고 싶은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양반이 무보수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인생 이모작 장소가 도산서원 옆에 자리 잡은 ‘선비문화수련원’이다. 김 이사장이 지난여름 아침에 선비수련원에서 자고 일어난 나를 수련원 뒤의 ‘회우정會友亭’으로 데리고 갔다. 정자에는 퇴계 선생 한시가 걸려 있었다.
孔門論會友
以文仍輔仁
공자 문하에서 친구 사귀는 도리는
학문을 매개로 사귀고 친구의 인격을 고양시켜주는 관계가 되어야 하며
非如市道交
利盡成路人
시장바닥의 사귐과는 다른 것이다.
시장바닥의 친구관계는 서로 이익이 다하면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처럼 된다.
마지막 구절인 이진성로인(利盡成路人)이 가슴에 묵직하게 남았다. 옛날에도 그랬었구나!
퇴계 선생이 친구 사귀는 법에서 가장 핵심으로 강조한 대목은 역시 이문잉보인(以文仍輔仁)이라는 대목이다. 학문을 매개로 해서 사귀고 서로인격을 도야하는 관계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 때문에 사귀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이 아닌 세상이다. 상(商)이 가장 위에 있는 세상이다. 한국사회는 재벌이 주인이고, 재벌이 양반이고, 재벌이 왕이다. 상은 무엇인가? 이끗과 돈을 추구하는 계층이다. 손해를 본다 싶으면 피눈물도 없이 사람을 버려야 하는 게 상의 정신이다. 피눈물이 있으면 사업 망한다. 이런 세상에서 학문과 인격도야를 매개로 친구를 사귀어야한다는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조선조 선비 사회에서나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지금은 대부분 ‘이진성로인(利盡成路人)’의 관계이다. 그러니 친구가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모두들 외로움을 느끼며 산다. 학문과 인격을 매개로 사귈 만한 친구를 만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우선 내 자신부터가 자본주의적 습관에 물들어 있는 게 아닌가. 인간세계는 친구 맺기가 쉽지 않고 오직 말 없는 자연과 청산青山이 친구가 되는 세상이다. 허교라! 허교도 쉽지 않다. 돈이 되면 허교하고 돈이 안 되면 절교를 정답으로 알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조용헌의 인생독법’중에서
길이 험하니 늦다고 꾸짖지 말게나
- 문경새재 토끼비리 -
경상도 사투리로 ‘벼랑’을 ‘비리’라고 부른다. ‘토끼비리’는 토끼가 다닐 만한 벼랑길을 일컫는다. 아주 좁은 절벽 길이다. 이 길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진남에 있는 옛길이다.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바위 절벽의 중간에 길을 낸 것이다.
왕건이 후백제 왕 견훤에게 쫓겨 도망갈 때 여기에 이르렀는데 앞을 보니 절벽으로 길이 막혀 있었다. 그때 마침 토끼가 절벽의 중간 허리쯤을 타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잘하면 사람도 갈 수 있겠다 싶어 뒤따랐다고 한다. 영남대로嶺南南大路 상에서 가장 험한 길로 알려져 있다.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길이 조령 고갯길인데, 문경새재로 들어가는 초입에 토끼비리가 있는 셈이다. 15년 전쯤부터 ‘한 번 가볼 만한 아슬아슬한 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마음먹고 밟아보게 되었다. 생사봉도生死逢道l라고 했던가, 생과 사를 길에서 맞이하겠다는 철학을 가진 일본사람도 있는데, 하물며 '로드Road’ 칼럼을 쓰는 사람이 어찌 길을 걸어 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이런 길을 걸을 때는 당일치기로 일정을 잡으면 안 된다. 근처에서 하룻밤 묵으며 느긋하게 주변 풍광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걸어야 한다.
문경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선생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묵기로 했다. 선생은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다. 펜션 이름이 가인강산佳人江山, 여기에서 하룻밤 묵으며 영강의 물소리를 들었다. 마침 비가 많이 내린 뒤라 물소리가 밤새 들렸다.
창문을 열어보니 토끼비리 길이 보이는 오정산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바위 절벽과 냇물이 어우러져 서로 끼고 돌아가면 그곳은 대부분 절경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토끼비리를 걸었다. 절벽 중간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벼랑 끝의 튀어나온 바위 바닥이 반질반질하다. 우마차나 수레는 다닐 수 없는 좁은 길을 사람이 걸으면서 생긴 흔적이다. 신발도 등산화가 어디 있었겠는가. 짚신을 신고 다녔을 것이다. 짚신 발로 바위가 이렇게 매끄럽게 변했을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걸어 다녔겠는가.
바위 절벽의 험한 곳은 턱이 겨우 20센티미터 밖에 안 되어 보였다. 간신히 한 발 딜 수 있는 틈이다. 여차해서 잘못 발을 디뎌 미끄러지면 70~80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진땀나는 길이다. 지금은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목조 계단을 설치했기 때문에 과거의 긴장감과 현장감을 느끼지는 못 한다. 이 위험한길은 대강 1킬로미터 정도 이어진다.
이 길은 어떤 사람들이 다녔을까? 주로 서울에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수험생들이었다. 영남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모두 도보로만 갈수 있는 길이었다. 산이 많은 조선 산천은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추풍령을 넘어가는 길은 김천에서 영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과거 수험생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이 길을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령 길은 영주에서 단양으로 넘어 가는 길이다. 죽 미끄러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가장 많이 다니던 길이 문경새재, 즉 경사로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聞慶)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조령길이었다.
길이란 무엇인가? 로마에 가서 아피아 가도를 걸어본 적이 있다. 기원전 312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이 도로는 로마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이어지며 각 도시를 연결했다. 그물망 같은 도 의 전체 길이는 무려 30여만 킬로미터, 지구를 일곱 바퀴 돌 수 있는 거리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벽돌과 차돌로 바닥을 깔아놓아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길이다. 그 바닥의 단단함과 넓이가 아시아 사람을 압도했다, 비가와도 질척거리지 않는 도로였다. 아피아 가도는 제국의 길이었다. 제국의 파워를 느끼게 해주는 길이었다.
일본 교토의 ‘철학의 길’도 걸어 보았다. 난젠자(南禪寺)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하천 옆을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된다.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사랑한 길이다. 과연 사색의 길이었다. 서양철학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고유의 철학이론을 세우려 한 이른바 교토학파(京都学派)가 이 길을 걸으면서 탄생되었다. 걷기는 철학자의 생각의 도구이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인 소요(逍遙)학파도 ‘걷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철학자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생각한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했다.
그렇다면 토끼비리는 어떤 길인가? 벼슬의 길이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등짐을 이고 진 장사꾼들인 보부상들도 이 길을 걸었겠지만, 주 통행인은 과거를 보러가는 수험생들이었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벼슬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감방과 유배·사약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다. 여차하면 실족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길이 토끼비리 길이다. 이 잔도(棧道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나무사다리 길)의 중간쯤에 옛 사람이 쓴 <관갑잔도>라는 제목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면곡綿谷 어변갑(魚變甲,1380-1434 )이 이 길을 넘어가면서 쓴 시다.
요새는 함곡관처럼 웅장하고
험한 길은 촉도처럼 기이하네
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려 하기 때문이요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 함곡관 : 중국 허난성에 있는 험난한 골짜기
* 촉도 : 촉나라의 길
토끼비리 길, 험한 인생길이지만 토끼처럼 꾀를 내서 헤쳐 나갈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조용헌의 인생독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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