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송담(松潭) 2017. 9. 11. 09:33

 

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이미지 출처 : 서울신문 2017.7.3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그걸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 무명 속에 사는 중생이기 때문이다. ‘보살행이란 깨달은 사람처럼 사는 삶을 지칭하는 말이다. “네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고 요약될 수 있는 자비행은 이런 보살행의 일부이다.

 

 자비가 설하는 실천의 윤리학을 기쁨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흔한 말로 사랑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흔한 사랑의 언행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누구나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혹은 친구나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가? 사실 일부 생물학자들은 그런 사랑의 이유는 물론,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의 강도조차 유전자라는 자연적 본능을 통해 설명한다. 본능에 속하는 것이라면, 굳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다들 하는 것 아닌가? 그걸 굳이 가르침이라고 내세울 이유가 있을까?

 

 세간에서 행해지는 자연적인 사랑은 유전자의 비유를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자신과 가까운 이들을 향해 있다. 가까운 만큼 더 사랑하고, 멀어지면 덜 사랑한다. 낯선 이들을 사랑하기 어렵고, 경계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나 적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반면 자비의 교설은 평등심을 요구한다. “진정한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해선 우선 평등심을 담아야 합니다.(달라이 라마) 평등심을 가지라는 말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말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친한 사람과 낯선 사람, 내게 호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차별을 두지 말고,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동등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물학자가 말하는 본능적사랑의 감정에 반한다. 왜 굳이 그래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친구들에게(즉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사실은 집착입니다. ‘나의 것이고 나의 친구이고 를 위해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집착입니다.(아름답게 사는 지혜)

 

 평등심을 갖는 자비는 또다시 모두를 사랑하라는 뻔한 말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니체는 네 이웃에게 등을 돌려라는 까칠한 말로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비판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가까이 이웃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설파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 주민이 아니라 멀리서 온 사람들, 동향인이 아니라 이방인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비슷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나와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쉽고 자연스러운 것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행해지지만, 낯설고 쉽지 않은 것은 애써 가르쳐도 행하기 어렵다.

 

이진경 / ‘불교를 철학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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