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비움의 가치

송담(松潭) 2020. 7. 13. 21:49

비움의 가치

 

 

동양 문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비움'이다. 인류 역사 최초로 숫자 '0'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은 인도인들이다. 서양에서는 '0'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세상은 신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진공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은 비움 즉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데,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에 비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0'이라는 개념은 무신론으로 여겼고, 이는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0'을 거부한 반면 인도인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0'을 쉽게 받아들였다. 인도의 힌두교는 우주가 무 에서 생겨났고 그 크기가 무한하다고 믿는다.

 

인도인에게 '0'은 창조이자 동시에 파괴이기도 했다. 그들이 믿는 시바 신은 무 자체다. 따라서 인도인들은 신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0'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인도에서는 '0'이라는 숫자가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하는 수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비움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양에서 비움은 창조의 시작이다. 비움에 큰 가치를 둔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일단 손에 잡히는 물질적 존재가 가득 차게 되면 오히려 성장의 잠재력이 소진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잘 나타난다.

 

진흙을 이겨서 질그릇을 만든다. 그러나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빈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게문(戶)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있는 것(有)이 이로움(利)이 된다는 것은 없는 것(無)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 11장)

 

석가모니는 비움의 가르침을 펼쳐서, 마음을 비움으로써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인생의 모든 고난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유하지 말고 비우라고 가르친다. 이는 일반적인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과 해탈이다.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인 '니르바나nirvan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해탈은 벗어났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비목사vimoks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열반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 모두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내가 죽기 전에도 수양을 하면 이를 수 있는 상태다. 열반에서 더 나아가면 해탈할 수 있다.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계속 반복해서 수레바퀴처럼 도는 '윤회의 삶'을 산다고 봤지만,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반복적인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해탈은 일종의 자유의 개념이다. 따라서 열반에 이르고 나서야 해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고 해탈에 이르는 것은 비움의 수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석가모니가 태어났던 시대에는 힌두교가 인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때다. 당시에는 출가해서 고행을 하면서 도를 터득하려는 수행자가 많았던 시절인데, 석가모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초반부터 웬만한 고행을 통한 수련을 마친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계속해서 명상을 해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비우는 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 중 하나다.

 

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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