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무아(無我)=무자성(無自性)=공(空)

송담(松潭) 2020. 8. 7. 12:05

무아(無我)=무자성(無自性)=공(空)

 

무아를 알면 자유가 보인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글자 그대로 풀면 '모든 법에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서 '법(法)'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를 번역한 한자어인데, 불교에서 다르마는 쉽게 말해 '우리가 구별해서 지각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결국 ‘제법(諸法)’은 지각되는 외부 대상이나 생각되는 관념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문제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의 ‘무아(無我)’ 라는 단어다. 무아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anaman)'을 번역한 한자어다. '아나트만'이라는 개념은 부정을 뜻하는 '아a'와 영원불멸한 본질이나 실체를 가리키는 '아트만úaman'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다. 그래서 '무아'라는 말을 단순히 '자아가 없다'라고 번역하면 그 뜻이 매우 협소해진다. 사람의 경우만 해도 '무아'는 단순히 자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도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과도 같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무아'라는 말보다는 차라리 낯설겠지만 ‘무자성(無自性)’이라는 불교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자성 svabhava)'이라는 말은 자기동일성, 본성, 본질, 혹은 실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제법무아'라는 가르침을 접할 때마다 '제법무자성'의 의미를 떠올려야 오해의 여지가 없다. 그래야 불교가 제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법 안에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영원불멸한 실체나 본성, 혹은 본질을 부정한다는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원불멸한 실체나 본성, 혹은 본질의 감옥에 갇힌 제법을 긍정하고 해방하려는 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불교 하면 떠오르는 개념인 '공(空, Sünyata)'은 모든 존재에게 자성은 비어 있다, 즉 '없다'는 의미다. 결국 하나의 공식처럼 외워두면 편하다. '무아=무자성=공'이라고 말이다.

 

'무아'의 가르침은 영원한 것, 불변하는 것, 본질적인 것에 대한 해묵은 맹신과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경덕전등록>에 등장하는 ‘단하소불(丹霞燒佛)’ 일화는 '무아=무자성=공의 가르침이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보여주는 근사한 사례다. 단하소불 일화는 혜림사에 잠시 묵게 된 단아(739-824) 스님이 목불(木佛)을 불태운 엽기적인 이야기다. 단하 스님이 추운 겨울에 떠돌아다니다 혜림사에 가서 머물기를 청했고, 이 절을 혼자 관리하던 스님은 단하 스님을 재워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동료 승려를 재워주는 것이 사찰의 불문율이기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혜림사 스님은 단하 스님을 여간 푸대접한 것이 아니었다. 추위를 몰아내려고 군불을 지핀 자기 승방에 단하 스님을 묵게 한 것이 아니라, 불을 때지 않아 추운 대웅전에 머물게 할 정도였다. 단하스님이 대웅전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혜림사 스님은 작은 목불을 모신 대웅전에서 이상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낌새에 잠에서 깨어, 불이라도 났을까 놀라 서둘러 대웅전으로 달려갔다. 대웅전에 들어가보니 단하 스님이 목불을 도끼로 쪼개 목불 조각을 땔나무로 삼아 불을 쬐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혜림사 스님은 크게 화를 냈다.

 

"중이 어떻게 부처를 태울 수가 있는가? 당신, 미친 게 아닌가? 그러자 단하 스님이 대답했다. "이 부처에 사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고 태웠습니다." 혜림사 스님은 단하 스님의 말에 황당해하며 말했다.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는가?" 이 말을 내뱉으면서 동시에 혜림사 스님은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까지 자신은 목불을 부처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먼지를 털어내며 소중히 모셨는데, 방금 그 목불이 부처가 아니라 나무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토로하고 말았으니 목불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목불이 공(空)하다는 걸 깨닫게 했으니, 단하 스님은 혜림사 스님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준 셈이다. 사실 '제법무아'이니, '목불무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목불에는 절대불변의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 놀면 어른들은 내려오라고 한다. 책상은 공부를 하는 자리이지 노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책상 위에 올라가면 사람들은 그가 책상의 본질을 모른다고, 혹은 아이들처럼 못 배웠다고 인상을 쓰기 마련이다. '제법유아'나 '제법유자성'이라는 발상이다. 책상 등 모든 존재에는 아트만이 있고, 자성이 있다는 생각인 셈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제법무아'의 가르침이 얼마나 혁명적인지가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존재에는 아트만, 혹은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표현으로 말하자면, 사물에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책상을 두고 얼어 죽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책상일 수 있고 땔나무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세상의 모든 존재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유가 자리 잡게 된다. 바로 이것이 혁명이자 자유의 의미가 아닌가? 세상과, 타자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혁명이니까.

 

책상에는 '앉아서 책을 보는 본질'이 존재하고, 목불에는 '경배를드러야 하는 본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만다. 책상은 우리에게 앉으라고 명령하고, 목불은 자신을 경배하라고 명령하는 형국이다. 사물의 명령을 듣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자유가 있을까? 자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가슴에 네 글자만 새기면 된다. '제법무아!' 모든 존재에는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본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액체를 담는 것을 컵의 절대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우리는 컵에 꽃을 꽂아둘 수도 있고 예쁜 구슬을 담을 수도 있다. 제법무아는 외부 대상에게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에게도 제법무아를 그대로 관철할 수 있다. 남자에게는 남성성이, 여성에게는 여성성이, 아버지에게는 부성이, 어머니에게는 모성이. 딸에게는 딸의 본성이, 아들에게는 아들의 본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남자들, 수많은 여자들, 수많은 아버지들, 수많은 어머니들, 수많은 아들들, 수많은 딸들의 삶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엄마는 이래야 한다', '아이는 이래야 한다' 등등의 억압적 담론으로부터 해방되므로, 그들은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자유롭게 맺을 수 있다. 자발성과 자유가 없다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강신주 /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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