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57

실패했다고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실패했다고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어제는 지인이 포스코 광양수련원에서 1박 할 수 있는 이용권을 줘서 김학영 형과 하룻밤을 자면서 지난 40 여 년간의 우정을 회고했습니다. 형은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제가 1년차 후배이고 같은 경주 김가(계림군파)에 같은 항렬입니다. 대학 3년 쯤 고시준비를 하면서 서로 처음 만났는데 젊은 시절 호기(呼氣)에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워 파출소에 끌려갔던 추억이 있습니다. 형은 행정고등고시와 입법고시를 합격한 2관왕이었고 저는 실력이 모자란 탓에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후 형은 청와대 법무비서관실(고위공직자 사정업무 담당)근무, 송파경찰서장, 화순, 고흥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고향에서 몇 차례 민선 군수에 도전했으나 민주당 공천이 곧 당선인 호남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전원일기 2023.05.20

삼합정원(三合庭園)

삼합정원(三合庭園)   전라도 음식에 ‘삼합(三合)’이라는 게 있습니다. 돼지고기, 홍어회, 묵은김치. 이 세 기지를 쌈싸듯 한 입에 넣어 먹는데 음식재료의 절묘한 조합이 감칠맛을 낸다고 합니다. 주로 잔칫집에 가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음식입니다.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 꽃, 돌. 이 세 가지의 조화로운 배치가 명품정원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동네 명품정원 홍광옥 & 성수형(제가 부르는 호칭)정원은 원래 명품 나무들로 잘 가꾸어진 정원인데 몇 년 부터는 나무 주변을 수반처럼 꽃으로 장식하여 금상첨화(錦上添花)로 만들더니 이제는 여기에 수석(돌)을 배치하여 ‘나무+꽃+돌’이라는 멋진 삼합정원(三合庭園)을 만들었습니다. 최근에 배치한 돌들은 거의 대부분 안방에서 좌대에 앉아 호강하고 있었던 것들인데 ..

전원일기 2023.05.16

전중기 수석 감상실

전중기 수석 감상실  50년 지기(知己) 전중기는 수석 애호가입니다. 친구가 보내준 문양석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돌에 새겨진 산수화의 진풍경을 보면 돌 하나가 우주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우리네 인생이 이렇게 단정하고 정갈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서로 오해하고 서운해 한 것들도 눈 녹듯 다 녹아버립니다. 돌 하나가 주는 안정감과 평화. 이것이 수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입니다.(2023.5.4)  우주의 기운  두 다리에 엉덩이를 내민 사람이 태양을 향해 장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우주의 기운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는 형상입니다.   달빛 내리는 밤   달빛 내리는 밤입니다. 교교한 달빛이 아름다운 산야에 숨 죽이고 있습니다.밤은 깊고 깊었으되 달빛이 환하니 님 ..

전원일기 2023.05.04

비오는 날의 전원일기

비오는 날의 전원일기 토부다원 연못 잔디밭 위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철에 내린 비지만 바람을 동반하지 않아 온순하다. 비를 맞으니 녹색은 더욱 선명해지고 전원은 한적하고 아늑하다. 봄에 모종으로 심은 채소들이 생기차고 고추, 가지, 토마토는 벌써 주렁주렁 다산과 풍요를 자랑하는 듯하다. 시원한 잔디밭과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지니 지난 날 아쉬워했던 것들도 다 부질없다. 법정스님께서 ‘인생은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골프는 나에겐 사치여서 배우지 못했고, 가족과 해외여행이 망설여지고, 명품 같은 상징이나 이미지를 소비하기 어려운 수준에 머문 나의 경제력은 격 높은 삶을 불가하게 했다. 반면, 이러한 경제수준은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에 꽈리를 틀고 ..

전원일기 2023.04.09

이웃집의 김장 축제

이웃집의 김장 축제 길가에 차들이 여러 대 주차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니 앞집 노인회장님댁에서 김장을 담는 날입니다. 시내 사는 아들 내외, 두 딸과 사위들이 모여서 많은 양의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지금은 한참 양념을 버무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 댁은 핵가족 시대에 보기 드물게 가족 간의 훈훈한 정이 살아 있는 집입니다. 그분들은 틈만 나면 수시로 모여 가족 이벤트를 갖습니다. 얼마 전에는 회장님의 팔순을 맞아 가족들이 제주도에 갔고 복장까지 통일해서 재미있게 놀고 왔다고 합니다. 우리 동네 외지에서 들어 온 집들은 거의 두 부부만 단출하게 살고 있는데 회장님 댁의 시끌벅쩍하고 정감이 있는 삶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친구 박형하가 이해인의 ‘12월의 노래’라는 시를 읽고 평한 글이 떠오..

전원일기 2022.12.10

여수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오늘도 여수에 와 구봉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빈 의자를 보고 잠깐 멈춰서 폰으로 사진을 찍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누군가가 앉아 있어야할 것 같은 자리가 비어있어 허전해 보였고 집사람과 함께 여기에 앉아 담소를 나누면 좋겠다며 홀로 산행을 아쉬워했습니다. 숲속이지만 의자가 깔끔했고 주변에 쌓인 낙엽이 푹신해 보였습니다.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제 인생의 시계도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리 아들이 사는 아파트단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은 지 30년이 지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왠지 위축됩니다. 하지만 집이 가까워지니 제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지어집니다. 집에 가면 집사람과 아들이 기다리..

전원일기 2022.10.24

요리하기, 하면 된다!

요리하기, 하면 된다! 제가 할 수 있는 요리는 국끓이기로 3년 전 집사람이 병원에 20여일 입원했을 때 처음 끓여 보았습니다. 종류는 콩나물국, 미역국, 김치찌개 등 3가지 정도입니다. 이 세 가지는 아주 간단하더군요. 그 후 반찬 같은 건 아직 만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최근 집사람이 여수 아들집에 가 있어 제가 1주일에 한 번씩 여수로 가서 1박 하고 옵니다. 올 때 집사람이 국, 반찬까지 챙겨주면 저는 전기밥솥에 밥만 하면 됩니다. 제가 큰 수술을 했던 사람이라 집사람이 걱정을 많이 하는데 별다른 불편 없이 혼자 잘 챙겨먹고 있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직접 호박 된장국을 끓여봤습니다. 집사람한테 전화를 해서 레시피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자력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호박을 자르고 씨를 뺀 다음 적당..

전원일기 2022.09.22

작은 돌들

작은 돌들  어린 아이들만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원생활을 하다보면 꽃과 나무를 옮겨 심고, 화분, 수석 등 소품들을 다시 배치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행동을 ‘소꿉놀이’라고 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습니다. 오늘도 활짝 핀 백합꽃 향기를 맡으며 돌과 소품들을 재배치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에도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라고 느끼지 않고 전원생활이 주는 행복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2022.6.16)

전원일기 2022.06.29

돌 하나의 위로(慰勞)

돌 하나의 위로(慰勞)  토테미즘 (Totemisn)이란 특정 동식물 혹은 자연물을 신성시하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도 토테미즘이고,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큰 나무를 신성시 하는 것도 토테미즘의 혼적입니다. 큰 수술로 마음이 약해져 그런 것일까? 제 마음속에도 조그맣게 토템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터널 같은 곳에서 27일간의 입원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언제나 아름다운 우리 집과 고요한 정원이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시 그 힘든 고통의 시간들을 회상했습니다.  안방으로 들어오니 탁자에 올려진 돌(수석)과 그 앞에 놓여진 거북과 학, 이 세 가지 물건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멋져 보였습니다. 평상시 무심코 보았던 것들이었는데 병원생활로 장기간 집을..

전원일기 2022.03.01

12월의 첫날에(2018.12월)

12월의 첫날에(2018.12월)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

전원일기 202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