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37

폐허의 미학, 리즈 커크스톨수도원

폐허의 미학, 리즈 커크스톨수도원 사진출처 : 컨슈머타임스 가을 벌판의 낡은 수도원은 황량한 시간의 역사 속에 그대로 갇혀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아주 가끔 날아오르는 까마귀 몇 마리만이 오랜 적막을 휘젓고 지나갔다. 런던으로 떠나는 기차는 서쪽에서 다가왔다가 동쪽으로 이내 멀어져 갔다. 자그마한 강물이 흐르고 반복되는 계절에 나이테만 두꺼워진 나무들은 쉬지 않고 마른 잎들을 지상으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나 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나는 항상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사색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형해화된 자취로 남아 쓸쓸했다. 모든 폐허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이전에 그곳은 집이거나 수도원이거나 인간의 냄새로 가득한 영역이었을..

여행, 걷기 2021.11.07

나에겐 이런 친구가 있다

나에겐 이런 친구가 있다 남파랑길 3차 출정을 마치고 순천만습지에서 아들과 함께 2021.10.29 내 친구 박형하는 70이 가까운 나이에도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 생장피드 데 포르데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 (33박34일)를 걸었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래킹(10박11일)을 했다. 국내에서는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부터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50구간 총 770km의 해파랑길을 마쳤고, 이어 부산 오륙도에서 전남 해남군 땅끝까지 1,463㎞, 국내 최장거리 탐방로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 육체와 정신의 담금질을 반복하면서 ‘걷기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친구는 끝없이 걷고 또 걷는 고난의 여정을 통해 매순간 ‘위대한 의식의 순간’을 포착하면서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지프스의 형벌을..

여행, 걷기 2021.11.01

산티아고 성지 순례 출발을 앞두고

산티아고 성지 순례 출발을 앞두고 내가 가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역 생장피드 데 포르데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의 멀고 먼 길을 걷는데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생의 업장業障을 해소할 수 있는 시련과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득한 옛날에 천붕지통으로 나에게 속할 물질들과 피를 나눈 인연들은 바람과 먼지로 변해 순식간에 흩어졌었다. 그 광풍이 나에게 남긴 것은 순박한 농투성이인 어머니와 어린 동생 다섯 명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의 업業은 롤러코스터처럼 나를 등에 태웠다가 내팽개쳤다가 내가 기진맥진하면 조그만 안식으로 위로를 해주곤 했다. 나는 이러한 업業이 주는 안식을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며 성취라고 오판했다. 나는 스스로 작은 위로에 안주하면서 왕성한 장년기를 보냈다. 돌이켜 곰곰이..

여행, 걷기 2021.10.25

남파랑길 2차 트래킹을 마치고

남파랑길 2차 트래킹을 마치고 박형하 가라산 정상석에서 아들 가라산은 up & down이 많고 너덜지대 22코스와 23코스를 합하여 22km이나 거제코스에서 가장 힘든 구간 남파랑길 2차 트래킹을 마쳤다. 5월 25일 집을 떠나 6월 7일 돌와 왔다. 출발은 15코스 시작점 충무도서관에서 35코스 종점 사천시 삼천포대교의 대방사거리에 도착했다. 트랭글앱에 기록된 거리는 총330km이었다. 수많은 트래킹을 해오면서 나는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나는 왜 트래킹을 하는가? 지금도 해답을 못 찾았다. 그래도 트래킹은 계속될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거제에 도착하니 버스기사들이 파업을 했다. 코스 이외의 이동은 택시를 이용했다. 만난 택시기사 중에 ‘돈 들여 고생을 사서 하는 분이시군요’라고 말을 하..

여행, 걷기 2021.06.18

잃어버린 여행가방

잃어버린 여행가방 설 연휴 동안 받아만 놓고 미처 읽지 못한 문예지를 뒤적이다가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mier의 산문 중에서 매우 이색적인 경매 이야기를 보고 혼자서 웃은 일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는 온갖 것을 다 경매에 부쳐서 잊혀진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보는가 하면 이미 죽은 사람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도 한다.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왕년의 스타의 연애편지나 착용하던 신발, 속옷 등속이 고가로 팔렸다는 해외 토픽을 접하면 그걸 그렇게 비싸게 사서 어디다 쓰려는 걸까 공연한 걱정이 되기도 하고, 생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면이 드러난 편지가 공개되는 걸 보면 세속의 호기심은 저승길까지 마다않고 쫓아다니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여행, 걷기 2021.01.29

남파랑길에서 온 편지

* 친구 박형하가 보낸 편지입니다. 남파랑길에서 온 편지 소피아로렌 주연의 해바라기 영화음악 감상 잘했습니다. 멋있는 친구를 둔 덕분에 마음을 순화시키는 음악을 종종 듣게 되어 행복합니다. 저는 통영까지 걷기를 마치고 어제 오후 늦게 귀가했습니다. 해파랑길은 아버지 같은 길이고 남파랑길은 어머니 같은 길이었습니다. 1차 남파랑길에는 친구도 왔었던 경남 고성의 거류면을 경유했습니다. 그곳에서 백발의 나는 40여 년 전의 보송보송한 솜털의 나를 방관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내 삶의 밑바닥이었더군요. 외롭고 춥고 무서운 격랑 속에 떠있는 조각배와 같은 시간이었음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걸을 수 있는 건강, 걸을 수 있는 ..

여행, 걷기 2020.11.26

강물이 살려낸 밤섬

강물이 살려낸 밤섬 -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 강물에 마음이 홀린 사람이 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유(流)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연(連)이다. 맹자에 나온다. 끝까지 가버린 사람들의 뒷소식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물을 따라간 사람들의 실종 사건은 영구 미제다.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은 상류와 하류 양쪽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상류의 끝은 시원(始原)이고, 하류의 끝은 소멸이다. 물은 시원에서 소멸 사이를 잇대어가면서 흐른다. 하류의 소멸이 상류의 시원을 이끌어내서, 신생은 소멸 안에 있다. 그러니 흐르는 강가에서 유와 연은 흐르고 싶은 인간의 자기 분열일 뿐, 강물 속에는 다만 진행중인 흐름이 있을 뿐이다. “흘러가는 것은 저러하구나”라고 공자는 ..

여행, 걷기 2019.12.07

해파랑길에서 온 편지

해파랑길에서 온 편지 여행은 3요소로 짜여 있다고 합니다. 떠남과 만남과 돌아옴이 그것입니다. 이번에 떠나는 길은 가본 적이 없고 동행 없이 걷는 길입니다. 떠남은 나를 둘러싼 철옹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쥐고 펴지 않는,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철옹성이지요. 집을 떠나서 먼저 만나는 것은 길입니다. 길은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돌아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노년의 삶은 외부 지향보다는 내부성찰이 올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깨달음의 만남입니다. 또한 저는 망망한 동해바다의 끝없는 포말의 생성과 소멸을 걷는 내내 목격 하였습니다. 그 포말은 지구촌의 개개 인간일 수도 있고 개인이 겪는 삶의 희로애락일 수도 있겠다는 발..

여행, 걷기 2019.11.25

세 번째 여행

여행과 현실 간의 간극을 줄이는 세 번째 여행 우리는 집을 떠나 경계 너머로 가서 여러 가지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활동을 하고 돌아오는 것만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행지에서의 생각과 활동이 여행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맞다. 그런데 여행지에서의 생각과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더 나아가 그것들이 나 자신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사전의 준비와 사후의 정리를 포함한 세 번의 여행이 오롯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출발 전 여행 (여행 준비), 현지에서의 여행, 그리고 귀환 후 여행(여행 정리)은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먼저 현지에서의 여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사전 준비를 하는 출발 전 여행이 충실이 진행되어야 한다. 여행지에 대한 관련 정보와 지식들을 풍성하게 미리 갖추어 놓는다면 여행은 더..

여행, 걷기 2019.10.07

'보러' 가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을 선암사

'보러' 가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을 선암사 인간은 오감을 통해 장소를 경험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 몸의 안테나가 되어 몸 밖의 것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우리는 여행에서 다른 감각보다 시각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행 가는 것을 곧 다른 것들을 '보러' 가는 것과 동일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작업은 그곳의 사진과 소개글을 '보는' 것이다. 현지 여행에서도 눈으로 '보는' 행위와 '본' 것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행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정리할 때도 '본' 것을 기록하고, ‘보고’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인간의 삶에서, 또 여행에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여행, 걷기 20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