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성지 순례 출발을 앞두고
내가 가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역 생장피드 데 포르데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의 멀고 먼 길을 걷는데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생의 업장業障을 해소할 수 있는 시련과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득한 옛날에 천붕지통으로 나에게 속할 물질들과 피를 나눈 인연들은 바람과 먼지로 변해 순식간에 흩어졌었다. 그 광풍이 나에게 남긴 것은 순박한 농투성이인 어머니와 어린 동생 다섯 명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의 업業은 롤러코스터처럼 나를 등에 태웠다가 내팽개쳤다가 내가 기진맥진하면 조그만 안식으로 위로를 해주곤 했다.
나는 이러한 업業이 주는 안식을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며 성취라고 오판했다. 나는 스스로 작은 위로에 안주하면서 왕성한 장년기를 보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업業은 나에게 선先 시련 후後 안식의 순서로 다가왔다. 정년 후 처음 맞는 봄철 어느 날, 출근 없는 휴식의 달콤함에 취하여 비 오는 창밖을 여유롭게 바라보다 우연히 방관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다.
방관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나의 여생은 캄캄한 밤의 칠흑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노후의 빈곤은 햇살처럼 환하게 보였다. 게다가 나의 분신들은 봄날 허공에 날리는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고 모호한 시간을 탐닉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지?” 절로 나오는 탄식과 함께 내 자신의 인생이 서글픔으로 번졌다.
남은 생은 정년을 하였으니 소일과 감사로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준비가 덜 된 노후는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움과 공포로 온 몸을 엄습하였다. 후손들의 번창과 노후의 빈곤을 벗어나는 최선의 대안은 자식농사에 달렸다는 것은 동서고금이 따로 놀지 않는데 나는 왜 이것을 소홀이 했을까?
이때부터 자책감과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내 자신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라는 것을 통감하니 세상이 허허로웠으며 지나온 삶의 궤적이 티끌처럼 가벼워 보였다. 이미 결정된 과거를 되살리거나 되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에 닿으면 나는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소리 없는 울음과 통곡으로 멍한 모습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몇 년 동안의 가슴앓이는 회한으로 차오르고, 보이지 않은 눈물은 강물처럼 흘렀으며, 활기 잃은 삶에는 늙음만이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이 불가피하다면 종래 그래왔듯이 이 시련의 다음도 안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유레카였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나에게 참음과 견딤과 기다림의 버팀목이 되었다.
역시나 업業은 경험칙을 외면 않고 두려움과 공포를 느슨하게 베풀어 주었다. 나는 외연을 확장하여 온실 밖의 광야를 모르는 화초의 탈온실을 위한 고난의 나아감을 기독교 3대 성지순례길인 스페인 산티아고로 정했다.
우리 부자는 출발을 앞두고 있다. 선 고난 후 안식이라는 업의 철칙이 나의 분신에게도 적용되길 빈다. 나의 분신이 담금 당하는 고난의 산티아고 대장정에 뒤이은 안식의 보자기 속에는 정체성 회복과 뚜렷하게 드러난 인생의 노란 화살표들이 많이 담겨 있기를 빌어본다.
산티아고는 인생이다.
산티아고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간다.
산티아고의 매서운 폭풍우도, 광활한 대지도, 따가운 햇볕도
노란 화살표이다.
산티아고에서는 땀도, 눈물도, 잠자리의 빈대도, 물집도, 통증도
노란 화살표이다,
노란 화살표는 보통 사람들이 가는 길 도처에 있다.
(2018. 4. 20)
* 위 글은 50년 지기 친구 박형하의 글입니다. 진솔하고 수려한 명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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