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세 번째 여행

송담(松潭) 2019. 10. 7. 18:36

 

여행과 현실 간의 간극을 줄이는

세 번째 여행

 

 

  당장 달라지는 글쓰기 팁 하나

 

 

 

우리는 집을 떠나 경계 너머로 가서 여러 가지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활동을 하고 돌아오는 것만을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행지에서의 생각과 활동이 여행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맞다. 그런데 여행지에서의 생각과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더 나아가 그것들이 나 자신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사전의 준비와 사후의 정리를 포함한 세 번의 여행이 오롯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출발 전 여행 (여행 준비), 현지에서의 여행, 그리고 귀환 후 여행(여행 정리)은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먼저 현지에서의 여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사전 준비를 하는 출발 전 여행이 충실이 진행되어야 한다. 여행지에 대한 관련 정보와 지식들을 풍성하게 미리 갖추어 놓는다면 여행은 더욱 알차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예약을 완료했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 만약 장기간의 여행이라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신축성 좋고 편안한 옷과 신발, 건강한 컨디션 유지에 도움을 주는 비타민, 긴장된 몸의 근육을 일시적이나마 풀어 주는 데 효과가 있는 파스 등은 흔히 놓치기 쉬운 유용한 물품들이다. 이외에도 내가 꼭 권하고 싶은 여행 준비물이 있다. 바로 현지인을 위한 준비물이다. 때때로 현지인들로부터 크고 작은 은혜를 입거나 신세를 지는 경우가 있다. 이때 자그마한 감사의 표시라도 할 수 있도록 부피는 작지만 의미 있는 선물을 준비해 가자, 나를 소개하거나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한국적인 기념품을 가져가 적절한 순간에 건네준다면 여행의 즐거움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여행 기간과 비용을 산정하는 일, 여행지 일정을 수립해 보는 일 등은 꼼꼼함의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행을 떠나는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여행자가 놓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세 번째 여행, 즉 여행 정리다. 여행 중에는 몸으로 전해지는 다채로운 느낌들 그리고 순간순간 번득거리는 앎의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몸속에서 과포화 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크고 작은 느낌과 생각은 정제되지 않으면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망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그 느낌과 생각이 소중하다면, 그래서 몸속에 오래 붙들어 두어 삶의 일부로 만들고 싶다면 부지런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저녁 시간 숙소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때야말로 과포화되어 있는 느낌을 풀어헤치고 정리하기 좋은 시간이다. 물론 저녁시간에 여행일지를 매일매일 작성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저녁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는 여행 일정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오봇한 시간을 저녁에 가질 수도 있다. 또 당일 일징이 너무 강행군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시시각각 경험한 일과 생각, 느낌 등을 그 현장에서 간단하게라도 메모하자. 요즘은 수첩과 펜도 필요 없다.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이 매우 편리해 손끝 터치만으로도 빠르게 메모가 가능하다.

 

 변화들을 이끌어 내고 내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 보고 싶다면, 또 한 번의 여행, 즉 정리를 위한 세 번째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돌아온 이후의 이 여행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현지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듯 SNS에 자신의 여행 행적을 올리던 여행자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제 끝났다." "참 좋았다." "아쉽다."를 간결하게 외치고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정리를 위한 여행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마지막 여행은 분주한 나의 일상에서 생계 현장으로의 복귀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난 여행을 돌이켜 보자. 여행 중 매일의 피곤함이 쌓여가던 고단한 몸과 그 몸을 누이던 불편하고 불안한 숙소 그리고 배낭 속에 물건들을 쑤셔 넣었다가 풀기를 반복한 여정. 그에 비하면 나의 일상은 5성급 호텔 그 이상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좋은 환경 속에서 몸에 남아 있는 오감의 향연을 정리해 보자. 현지에서는 해결하지 못해 공란으로 비워 둔 여러 의문과 호기심에도 답해 보자. 이때 글을 쓰는 활동은 기억과 흔적을 단순히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이루어진 나, 여행지, 현지인과의 관계를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또한 이런 활동을 천천히 진행하다보면, 여행할 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의문과 문제들도 떠오르곤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자료 수집과 공부가 이어지고, 앎의 즐거움은 더욱 쌓이게 된다. 이런 작업들은 나만의 훌륭한 여행기를 탄생시킨다. 기존의 앎과 새로운 앎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엮이면서 남부럽지 않은 여행 안내서가 완성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내가 여행한 곳을 모두 담고 있는 큰 지도를 펼쳐놓고 들른 곳들을 하나하나 찍어 보자, 그리고 지도 위에 사진과 기록들을 연결시켜 나가면서 다시 한 번 전체의 지리적 맥락을 파악해 보자. 이때 나는 46배판(257 *188) 교과서 크기의 넓은 종이지도를 선호하는 편이다. 책장 한구석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을 고등학교 지리부도가 이 크기다. 세계 전체가 지역별로 분리되어 있는 이 지도집은 총천연색으로 채색되어 있어 수시로 펼쳐서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미 쓸모없는 책이라고 치워버렸다면 다시 한 번 구매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가격도 착해서 가성비로 따지면 최고의 책이다. 무엇보다 여행의 전체 경로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유용하다.

 

 지도는 세 번째 여행에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동반자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살펴보는 지도와 여행을 다녀온 후에 살펴보는 지도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행에서는 현지 여행을 통해 변화가 생긴 여행자의 심상지도가 객관적인 지도에 비추어진다. 즉 객관적인 지도를 새롭게 바라보고 세상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행과 지리가 가져다주는 가치 있는 능력이자 커다란 즐거움이 아닐까?

 

 세 번째 여행을 수행하다 보면, 지나간 여행이 온전히 내 것으로 완성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마무리 과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세 번째 여행을 거치고 나면 세계 여러 장소에 대한 지리적, 문화적 통찰력이 커지게 된다. 내가 다녀온 여행지와 지리적으로 이웃한 혹은 문화적으로 연결된 장소로 나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봄 햇살에 새싹이 돋아나듯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제 지도는 단순히 여행의 길 안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의 다음 여행지를 탐색토록 하는 지리적 상상의 놀이터가 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익숙한 이곳의 장소에 머무르면서 일상을 영위해 간다는 뜻이다. 익숙한 일상이 있기에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을 살아 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떠나고 움직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정착적인 일상과 이동적인 여행은 마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상호 반영적이고 보완적인 활동이다. 그러한 정착과 이동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가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결국 떠남은 머무름을 만들고 머무름은 다시 떠남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 아닐까?

 

 이영민 / ‘지리학자의 인문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