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의 나폴레옹
노천카페에서 뜨끈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기력을 충전한 다음, 거리의 상가들을 구경하면서 에투알 개선문으로 갔다. 지하도를 건너기 전에 광장 로터리 바깥쪽을 돌면서 높이 50미터 폭 45미터 정도 되는 개선문의 외관을 살펴보았다. 1806년 시작했던 건축공사가 러시아 원정 참패로 한동안 중단된 탓에,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 사후 15년이 되던 1836년에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에투알 개선문은 나폴레옹 개인만이 아니라 대혁명과 프랑스 현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나폴레옹의 여러 전승 장면이나 병사들의 출정 풍경과 함께 대혁명 직후 영웅적 전투를 수행한 마르소 장군과 최초의 공화정을 세운 1792년 시민군의 모습도 부조해 놓았다. 중앙 제단의 꽃과 파르라니 타오르는 불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를 추모한다.
시테섬에서 루브르를 거쳐 개선문까지, 파리의 중심지는 왕실과 귀족계급의 권력과 부를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대혁명은 정치제도를 변혁했을 뿐만 아니라 왕의 권력 공간도 자유와 다양성이 넘치는 시민의 생활공간으로 바꾸었다. 개선문 전망대에 오르면 드골 광장의 원래 이름이 왜 에투알(étoile, 별) 광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상젤리제 거리를 포함한 길 12개가 광장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드골 광장이라니? 별마당이 훨씬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이름 아닌가!' 광장 이름을 잘못 바꾸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을 생각해보기에 적절한 곳이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모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대혁명의 전사로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했고, 자유의 깃발을 높이 흔들며 주변 군주국의 동맹을 깨뜨리고 유럽을 평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인기를 이용해 황제가 됨으로써 대혁명의 정신을 배반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넬슨 제독 함대에 궤멸당한 탓에 이집트에 고립되자 몰래 파리로 돌아와 1799년 11월 이른바 ‘브뤼메르 쿠데타’를 일으켰다. 폭력으로 정부를 해산한 다음 국민투표를 시행해 새 헌법을 제정하고 10년 임기의 제1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이었다. 연합국이 강화 제안을 거절하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해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라인강 일대와 북이탈리아를 보호령으로 만들었을 때는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나폴레옹은 여러 면에서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제위에 올랐다는 점은 달랐지만, 그도 카이사르처럼 민중의 열망과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조세제도와 행정조직을 정비했고 제조업과 금융업을 진흥했으며, 공공교육법을 제정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민법체계를 세웠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파벌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인재를 중용하는 인사제도를 확립했다.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기 전에 암살당했지만 나폴레옹은 황제가 됨으로써 과거의 자신을 죽였다. 그는 1802년 8월 아부꾼들의 부추김을 받고 국민투표를 시행해 만장일치에 육박하는 찬성표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가의 예배당이었던 생드니 성당을 내치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열었을 때, 왕의 목을 잘랐던 대혁명의 깃발은 땅에 떨어졌다. 왕정을 폐지한 혁명이 겨우 10년 만에 제정으로 귀결되었으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었다.
나폴레옹 황제는 파리를 제국의 수도답게 만들고 싶었다. 묘지를 정리하고 도심 곳곳에 분수를 만들었으며 광장과 공연장, 시장, 제방, 교량 등 공공시설을 만들었다. 그러나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군주국들이 또다시 동맹을 체결해 프랑스를 공격하는 상황이라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빈을 점령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군에게 대패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해방군이라며 반겼던 유럽의 민중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폴레옹의 자의적인 통치와 점령군처럼 행동한 프랑스 군인들의 횡포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때는 독일과 폴란드에 이어 스페인까지 점령했지만 기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영국을 겨냥한 대륙봉쇄령이 유럽 대륙에도 심각한 경제 위기를 몰고 온 것도 나폴레옹의 몰락을 부추겼다. 참다못한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위반하자 나폴레옹은 1812년 60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를 침공했다. 러시아군이 도시와 들판에 불을 지르고 후퇴한 탓에 프랑스군은 손쉽게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식량 부족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다가 추격해 온 러시아군에 전멸당했다.
고전을 거듭하던 프랑스는 1814년에 파리를 빼앗겼고,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중부 서쪽 앞바다의 엘바섬으로 쫓겨났다. 유럽 전역에서 왕정복고의 반동이 밀어닥쳤다. 그런데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이 되어 형 못지않게 어리석고 무능한 짓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와 황제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백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위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 완패한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영국렁 세인트헬레나섬에 갇혀 체스와 영어 공부로 소일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세계관을 구술한 회고록을 남기고 1821년 5월 5일에 사망했다. 유해는 1840년 프랑스 정부가 영국 정부의 협조를 받아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했다.
< 2 >
콩코르드 광장에서 에투알 개선문이 있는 드골 광장까지 2킬로미터 정도 곧게 뻗은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광장에서 600미터 떨어진 로터리까지 오른편에 펼쳐지는 샹젤리제 정원은 엘리제 궁전의 정원이었다.
에리제 궁전은 대통령의 관저여서 멀리서만 보고 지나쳤다. 이 궁전은 1722년 완공했는데, 그때 루이 15세가 열두 살이었으니 그가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공식 정부(情婦)' 마담 퐁파두르에게 파리의 최고 품격 건물로 평가받던 엘리제 궁전을 선물로 주었다. 분개한 시민들이 '매춘부의 집'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는 그 궁전을 대통령 관저로 쓰고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프랑스 사람들, 대단하군!'
정부(情婦)는 ‘아내 있는 남자가 몰래 정을 통하는 여자’이니 ‘공식’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르봉가의 왕들은 다들 '공식 정부'를 두었다. 그리고 ‘공식 정부’ 라는 말은 ‘비공식 애인’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긴, 누군가 왕의 '공식 정부'가 되려면 먼저 '비공식 애인'이 되어야 하니,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앙리 4세 이전의 왕들이 그렇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창시자인 앙리 4세부터 루이 15까지 부르봉가의 왕들은 특히 심했다. 유일한 예외가 루이 16세였는데, 왕비만 바라본다고 해서 오히려 왕답지 않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프랑스 국민들이 총리나 대통령의 사생활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역사적 전통'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마담 퐁파두르의 원래 이름은 잔-앙투아네트 푸아송이었다. 평민이지만 재산이 많은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나 귀족 교육을 받고 자란 이 여인은 독서를 즐겼고 예술적 재능이 있었으며 다른 무엇보다 예뻤다. 악기 연주, 그림, 보석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 솜씨를 발휘했고, 식물학을 공부한 조경 전문가이기도 했다. 잔-앙투아네트는 딸이 있는 유부녀였지만 왕의 여자가 된다는 점괘를 믿었다. 말을 타고 왕의 사냥터 근처를 오가는 등의 집요한 노력 끝에 마침내 왕의 애인이 되었을 때 잔-앙투아네트는 스물세 살이고 왕은 서른네 살이었다.
루이 15세는 1년 정도 지나 잔-앙투아네트에게 퐁파두르 후작이라는 새 이름과 작위를 주고 베르사유 궁전에 데뷔시켰다. 몰락한 폴란드 왕가의 공주였던 레슈친스카 왕비는 퐁파두르를 왕의 '공식 정부'로 선선히 인정했다. 루이 15세보다 일곱 살 많았던 왕비는 13년 동안 쌍둥이를 포함해 11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또 아이가 생길까 두려워 남편이 침실에 오는 것을 마다하던 터였다.
마담 퐁파두르는 엘리제 궁전에 살면서 왕비 이상의 역할을 했다.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살롱에 초대했고 여러 유능한 남자들을 각료로 추천했으며 정부의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한편 예술가를 후원하고, 극장을 짓고, 도자기와 그림을 수집했다. 퐁파두르는 서른 살이 넘은 뒤로는 왕의 침실에 가지 않았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젊고 예쁜 여인들을 데려가 왕의 신임을 받았고 마흔세 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풍파두르가 죽자 왕실은 엘리제 궁전을 금융업자 니콜라 보종에게 매각했는데, 프랑스의 최고 갑부였던 새 주인은 정원을 더 화려하게 바꾸고 최고 수준의 예술품으로 실내를 장식해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궁전을 루이 16세에게 바쳤다. 대혁명 이후 잠깐 인쇄공장으로 쓰였던 엘리제 궁전을 나폴레옹은 무도회장으로 재활용했으며 나폴레옹 3세는 밀회 장소로 이용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들어선 후 엘리제 궁전은 공식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이것을 거주 공간과 집무실이 제대로 갖추어진 관저로 만든 사람은 1959년에 출범한 제5공화국의 드골 대통령이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사회주의자답게 궁전을 싫어해서 사택에 살며 출퇴근했다. 반면 우파 시라크 대통령은 1995년부터 두 차례 임기 12년 내내 이곳에 살면서 관저 예산을 크게 늘렸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부인과 이혼한 탓에 아파트에 머물렀고, 2017년 마흔 살에 대통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과 연상의 부인은 관저에 들어갔다.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샹젤리제 정원을 벗어나 상업 시설이 줄지어 선 샹젤리제 거리에 진입했다. 이 거리를 가지 않는 파리 여행자는 없을 것이다. 샹젤리제 거리는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나중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만든 조경 전문가 앙드레 르 노트르에게 의뢰해서 만든 산책로였다. 앙리 4세는 돈을 노려 왕비와 이혼하고 마리와 혼인했지만, 하필이면 그때 메디치 가문이 파산 상태여서 헛물만 켰다. '엘리제'는 그리스 신화의 낙원을 가리키는 말이니 '상젤리제'는 ‘낙원의 뜰’ 로 번역할 수 있다. 1836년 에투알 개선문을 완공한 이후 이 거리는 큰 인기를 끌었고, 나폴레옹 3세와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이 파리 도심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새로운 도시계획을 실행하면서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 플라타너스와 마로니에를 심은 거리 양편에 부자와 권력자와 예술가들이 저택을 지었고,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상점, 화랑, 노천카페가 촘촘하게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패스트푸드 체인점, 영화관, 기념품점, 여행사 사무실. 노점이 늘어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샹젤리제 거리를 '파리의 명동길'이라고 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우선 이 거리는 폭이 70미터나 된다. 서울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큰길 주변을 명동처럼 만들면 비슷한 분위기가 날 듯하다. 하지만 샹젤리제는 그저 넓기만 한 거리가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다. 나폴레옹은 관에 누운 채 이 길을 지나 개선문을 통과한 다음 앵발리드 성당 지하에 묻혔다. 1871년 파리를 점령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프리드리히 왕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대관식을 하기 전에 이 길을 행진했다. 1940년에는 히틀러가, 1944년 8월에는 드골 장군이 행진했다. 프랑스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결승전을 치를 때도 축구 팬들이 여기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럴 때 샹젤리제 거리는 촛불집회와 월드컵 응원이 열리는 광화문광장과 비슷해진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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