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란 무엇인가
1.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프랑스)는 자신의 저서『시지프 신화』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아침에 일어나 전차를 타고 출근하고,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네 시간 동안 일하고,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직장에서 네 시간 동안 일하고, 그 다음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고...... 이렇게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왜,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의문이 떠오르게 되면 놀라움과 지겨움이 뒤섞인 느낌이 솟아오른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하게 살아가는 이러한 일을 카뮈는 ‘부조리(不條理)’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부조리란 논리에 맞지 않는 것, 즉 앞뒤가 맞지 않아 이해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의미 없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부조리 중의 부조리’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은 아무런 보람도 희망도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이며 카뮈는 이런 고통을 ‘시지프의 형벌’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온 시지프스는 여러 신들과 싸우다가 신들로부터 형벌을 받는데 그것은 높은 바위산 위로 거대한 바위를 계곡으로부터 밀어 올리는 것이었고 온 힘을 다해 정상에 올려놓으면 바로 그 순간 제 무게로 인해 다시 반대편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어 매번 처음부터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계속해야만 하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래서 카뮈는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통을 시지프의 형벌에 비유했다.
한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도 일기 형식으로 쓴 소설『구토』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 하다. 공원도 도시도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알게 되면 속이 울렁거리고 모든 것이 가물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구토가 치민다”고 주인공을 통해 말했다.
2. 무의미한 삶에 대한 실존주의적 접근
가. 사막에서 버티기
카뮈는 시지프에게 무의미한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무의한 삶으로부터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단정한다. 그래서 시지프나 우리에게는 오직 단 두 가지의 선택이 주어지는데 ‘희망을 갖고 사는 것’과 ‘자살하는 것’이라고 했고 자살은 죽음과 함께 모든 문제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문제를 없애 버리는 것일 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해결 방법으로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는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라고 했다.
‘사막에서 버티기’란 부질없는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자, 오지 않는 구원에 호소함 없이 사는 것이라 했으며 자살로써 회피하거나 기권하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의미한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항하라 했다. 시지프적 상황, 곧 삶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절망적인 상황에 반항하고 그것과 내기를 하여 이기라는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가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과 상황에 대하여 이미 반항하고 동시에 승리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주는 인간의 삶은 신들마저도 무의미하게 할 수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신들에 대한 시지프의 승리와 같다고 했다. 시지프가 취한 태도를 요즈음 우리들이 자주 하는 말로하면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겨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누구나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그러한 삶이 자기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위대한 의식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부터 비로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 자신에게 의미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즉 정말 자기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더 이상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지 않고, 마치 하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매 순간순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진정한 자기로서 살아가는 것을 철학에서는 ‘실존한다’고 부르고, ‘실존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로서 산다.”는 뜻이며 이러한 주장들을 모아 놓은 것을 ‘실존주의 철학’이라 한다.
나. 자신을 잡아매는 ‘앙가주망’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 “어떤 것에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잡아매는 행위”를 사르트는 앙가주망이라 했다. 우리말로 흔히 ‘참여’라고 번역되는 앙가주망(engagement)은 본래 ‘구속(拘束)’이나 ‘계약(契約)’을 뜻하는 프랑스 말인데 사르트가 특별하게 사용했다. 앙가주망은 이란 현재상태로부터의 ‘자기 해방’인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상태로의 ‘자기 구속’이라 할 수 있다.
사르트는 앙가주망의 방법으로 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사회 문제에 자신을 잡아매라고 했고 자신도 쿠바와 월맹을 지지하며 미국에 맞섰고, 항가리나 폴란드에 침입한 소련에도 대항하는 등, 평생을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처럼 사회운동에 직접 뛰어드는 것만이 앙가주망이 아니다. 학문이나 예술 그리고 종교등 가치를 지닌 모든 일들이 인간 스스로를 잡아맬 대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도 사회문제에 참여할 수 있다.
다.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본래적 자기로서 사는 방법’, 곧 ‘실존을 하는 방법’ 중 하나로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감”이라는 방법을 내놓았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고 싶으면 , 예를 들어 1년이나 2년 후쯤 죽는다고 상상해 보라는 뜻이다. 그러면 비로소 정말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이들을 하는 것이 ‘본래적 자기’로 사는 방법이며 사람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기획투사(企劃投射)’라고 불렀다.
기획투사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이해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를 내 던진다는 뜻으로 사르트가 말하는 ‘앙가주망’과 비슷한 의미이다. 아무리 지겹고 힘든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그저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서 하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니 지겹고 힘들어서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 될 때마다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가 보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죽음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의미를 준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신들은 언젠가 죽을 수 있는 우리 인간들을 질투한다고도 생각했다. 죽음이란 모든 사람들의 삶 가운데 언제나 자리 잡고 있고, 또 날마다 한걸음씩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이런 뜻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 앞에 선 존재’라고 불렀다.
죽음 앞에 미리 달려가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지금까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이 하찮은 일로 변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하찮게 생각했던 일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뉴욕의 9.11 테러 사건 때, 비행기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잠깐 남은 마지막 시간에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보통 때는 이렇게 소중한 일들을 대개 잊고 산다. 그러다가 죽음 앞에 서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자기가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말이다.
하이데거의 말에 따라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가 보면 이런 모든 것을 앞서서 깨닫게 되고 무엇보다도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생각된다.
오늘이란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남은 날들 중 첫날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고 나면 삶은 결코 지겹고 힘들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김용규/‘철학 통조림 2’에서 발췌 정리
(소제목, 문장 연결 등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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