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 ‘성장’에 관하여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나는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던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데미안>은 싱클레어라는 소년의 대략 열 살에서 스무 살에 이르는 내적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순진무구한 아들인 싱클레어는 세상을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로 나누어 인식한다. 빛의 세계는 집 안이자 곧 질서의 세계로써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관용과 선의, 사랑과 존경, 성경의 말씀과 지혜가 가득한 세계이고, 여기에서도 잘못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수로서 회개와 용서를 통해 다시 밝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된 즉 ‘낙원 추방 이전의 세계’이다.
반면에 어둠의 세계는 집 밖이자 하녀와 술주정꾼들의 세계, 곧 혼돈의 세계로써 귀신, 추문, 끔찍하고 알 수 없는 사건, 도살장, 감옥, 싸우는 여자, 강도, 살인, 자살자들의 세계이다. 그곳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낙원 추방 이후의 세계’로서 여기에는 죄책감과 절망뿐이지만 그러나 뭔가 설레고 피를 끊게 하며 유혹하는 마성의 힘이 있는 세계, 곧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이 쫓겨난 에덴의 동쪽이다.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의 다른 표현은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로 각각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밝은 이성의 충복이지만 동시에 어두운 감성의 노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순진무구란 소년 싱클레어가 어둠의 세계에 속하는 크로머라는 동급생에게 단지 기죽기 싫은 마음에서 자기도 사과를 훔친 적이 있다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소한 거짓말이 어린 소년의 내면에서는 뱀의 유혹으로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은 최초의 범죄 곧 ‘원죄 사건’이 된다. 그는 한편으로는 어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에 대한 두려움에 떨지만,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빛의 세계에만 머무는 ‘아버지보다 낫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 돈을 요구하는 크로머에게 시달려 저금통을 털게 되고 죽음과 같은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소년 내면에 낙원 추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담의 경우가 그랬듯이 모든 낙원 추방은 신과 하나였던 인간의 죽음이지만
동시에 ‘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탄생’이다.
이때 소년 싱클레어 앞에 상급생 데미안이 나타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보기에 육체적 강건함과 정신적 성숙함을 갖춘 완벽한 초인으로서, 그동안 싱클레어에게 뱀 같은 존재였던 크레머로부터 그를 해방시켜주고 새로운 인도자가 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세상을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로 나누어 아름답고 고상하고 선한 한쪽만을 인정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친다.
데미안의 가르침으로 싱클레어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의 대립은 자신의 내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곧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데미안>을 쓴 헤세가 ‘인간의 자아실현’과 ‘인간의 구원’을 나란히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싱클레어는 빛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어둠을 욕망하다가 어둠의 세계에 거하면 다시 빛의 세계를 갈구하는 이러한 이중생활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싱클레어는 꿈에서 본 새의 그림을 그려서 데미안에게 보내는데 데미안은 다음과 같이 답장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인 신’이다.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함께 소유하고 지배하는 신이다. 이것은 데미안이 어느 세계에 속하든 다른 반쪽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함께 죄의식에 시달려야하는 편협한 반쪽만의 세계에서 벗어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충만한 세계로 나아갈 것을 싱클레어에게 요구한 것이다.
낮과 밤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 신의 동일한 뜻을
이루는데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다.
용감히, 그리고 두려워 말고
성숙한 인간이란 자기 내면에 있어 대립하는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룬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만이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알아내고 그 껍질을 벗겨서 진정한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일’. 곧 자기실현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뱀이 허물을 벗고 성장하듯’
몇 번이고 주어진 자기를 부수고
죽을 것 같은 절망과 고통을 견디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헤세는 이러한 성장과 자기실현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당부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위로한다.
“신이 우리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모든 꽃들이 시들 듯이
청춘이 세월 속에 무릎을 꿇듯이
인생의 모든 단계는 지혜를 꽃피우지만
지혜도 덕망도 잠시일 뿐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 이별을 준비하고 새 출발 하라.
용감히, 그리고 두려워 말고
새로운 이끌림에 몸을 맡겨라.
새로운 시작에는 언제나 마술적 힘이
우리를 감싸, 사는 것을 도와주리니...
(헤세 ‘삶의 단계’중에서)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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