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송담(松潭) 2014. 12. 14. 17:47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등장배경

 

 20세기 실존주의의 등장배경은 먼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히틀러와 핵폭탄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고, 미군이 떨어뜨린 핵폭탄은 히로시마에 있던 20만명의 일본인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를 본 수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빠집니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되었는가?” 5,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2차 세계대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엄청난 회의를 가져온 것입니다.

 

 

 실존주의가 뭐지?

 

 그렇다면 실존주의란 무엇일까요? 실존주의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대상을 본질존재로 구분합니다. 물건과 인간은 비교해 보면서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본질과 존재가 무엇인지 살펴보죠.

 

 먼저 물건을 봅시다. 의자의 존재는 의자 그 자체인데, 의자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의자의 본질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가구라는 것이죠. , 그런데 만약 의자 다리가 부러졌다면, 여러분은 앉을 수 없는그 의자를 버리겠지요. 즉 물건은 본질이 존재에 앞섭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잘나거나 못나거나 예쁘거나 못생기거나, 부모님한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자식입니다. 어머니는 못나거나 못생겼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리지 않죠. 왜냐하면 자식은 그 존재만으로도 의미 있는 존재니까요. 즉 인간은 인간을 본질이 아닌 존재로 대우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실존주의의 멋있는 말이 나옵니다. “인간은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이 물화되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인간을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대우합니다. 인간 자체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본질로서 대우하죠. 마치 의자처럼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떠올려 보세요. 공장에서 주인공 찰리는 나사를 조이는 기계 취급을 받지요. 즉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존재로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물건으로 전략하였지요. 인간의 물화(物化)’, 즉 인간이 물건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다리가 부러지면 버려지는 의자처럼, 존재가 아닌 본질로 취급을 당합니다.

 

 

 ‘기투하는 인간

 

 그럼, 다시 실존주의의 명제를 보죠. “인간은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이 명제의 의미를 좀더 들여다볼까요? 먼저 실존주의 철학의 주요한 개념인 기투(project)를 살펴보죠. 기투(企投)는 말 그대로 보면 꾀할 기(), 던질 투(), ‘던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디로 던진다는 것일까요?

 

 기투란 인간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자신 스스로를 던지는 실존의 방식을 말합니다. 하이데거가 주장한 개념이죠. 무슨 말인지 쉽게 풀어보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데는 우리의 어떠한 의지도 작용하지 않았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존재”, 즉 피투(被投)된 존재, 목적 없이 던져짐을 당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스스로 던짐으로써(기투)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갑니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존재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기에, 인간에게는 본질도 없다.”

 

 칼의 본질은 자르는 물건이고 의자의 본질은 앉을 수 있는 가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역으로 인간이란 본질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 앞에 펼쳐진 미래의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기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최진기 /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중에서

 

< 추가 자료 >

 

진짜 인간은 실존의 인간이다. 여기서 실존의 인간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맥락대로 '본질에 앞서는 인간' 을 말한다. 본질에 앞서다니 무슨 뜻인가. 본질은 이미 확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숙명적인 성질을 말한다. 가령 책상이나 책, 자동차, 축구공 등은 이미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속성들을 갖는다. 그것들을 이용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러한 속성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상으로 축구하거나 축구공 위에 책을 펼쳐놓거나 하지 않는다. 책상은 책상의 본질이 있고 축구공은 축구공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상이나 축구공의 경우에는 본질, 즉 움직일 수 없는 성질이 먼저 주어져 있다. 가령 책상을 만드는 목수는 먼저 '책 퍼서 공부하는 도구' 라는 본질을 먼저 생각하고 책상을 만들고, 축구공을 만드는 기술자는 발로 차서 상대의 골문에 넣는 것으로 승패를 가르는 게임의 도구라는 본질을 우선 생각하고 축구공을 만든다. 그러므로 책상이나 축구공은 다짜고짜 먼저 만들어진 다음, 즉 존재가 먼저 생긴 다음에 그 생긴 모양이나 성질에 맞춰서 목적과 용도, 즉 본질을 찾아내는 게 아니다. 반대로 목수나 기술자의 머리 안에 미리 목적, 성질, 착안 등 본질에 맞춰서 그러한 도구들, 즉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본질이 먼저 있고 존재가 그것에 맞춰서 만들어지는 것을 즉자존재(卽自存在)라고 불렀다. 컴퓨터, 휴대전화, 적외선 감지장치, 인터넷, 프로그램, 인공지능, 이런 것들은 모두 즉자존재다. 이것들은 본질이 먼저이고 존재는 그 다음이다. 제작자의 머리 안에 먼저 착상된 숙명적인 본질에 따라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으니 선택할 수 없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있다. 본질보다 앞서는 이 존재는 목수나 기술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존재다. 이 자유의 존재, 선택의 존재를 사르트르는 대자존재(對自存在)라고 불렀다. 물론 이런 존재방식은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은 축구공이나 책상처럼 숙명적으로 결정된 본질이 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지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게 만들어간다. 존재가 먼저이고 본질은 그 다음의 문제다. 이러한 대자존재를 더 익숙한 표현으로 '주체성의 존재' 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왕주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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