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인식
인식 대상이 비교적 간단한 경우와 달리 사회, 민족, 시대와 같이 총체적인 경우에는 필자의 관찰력, 문장력, 부지런함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관점과 역사관, 철학적 세계관과 같은 과학적 인식 체계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입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맺어져 있는가가 결정적입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상과 자기가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맺어짐이 없이, 즉 대상과 필자의 혼연한 육화(肉化)없이 대상을 인식하고 서술할 수 있다는 환상, 이 환상이야말로 정보 문화와 저널리즘이 양산해 낸 허구입니다. 제 3의 입장, 가치중립의 객관적 입장을 내세우는 저널리즘은 대상과 관계를 가진 일체의 입장을 불순하고 편협한 것이라고 폄하합니다. 막상 언론 자신은 스스로 권력이 되어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객관적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편당(偏黨)과 야합을 은폐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객관은 뒤집으면 관객(觀客)이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구경꾼이 되게 합니다. 사람을 관객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이란 관계 맺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들의 삶이 주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정보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또 대화 중에 사람에 관한 것이 가장 많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람인 경우, 많은 정보는 그 사람을 아는 데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나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A가 B를 잘 알기 위해서는 B가 A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잘 안다는 것은 서로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관계 없는 사람에게 자기를 정직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노래 가사에도 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대단히 철학적인 가사입니다. 잘 알기 위해서는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면 애초부터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애정의 수준일 때 비로소 최고의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애정은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바로 저널리즘이 양산하고 있는 위장된 객관성입니다. 애정이 없으면 아예 인식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애정이야말로 인식을 심화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관계와 애정 없이 인식은 없습니다. 이 글의 단초가 된 일본인기자는 한국 근무 4~5년차의 베테랑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빈번하게 이사하는 까닭은 기마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세 값이 올라서 어쩔 수 없이 이사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세가(貰家)를 전전하는 고달픈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습니다. 이삿짐 트럭이 많다는 사실과 기마민족에 대한 기존의 지식이 결합된 글이었습니다. 모든 인식은 그 대상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발견해 내는 것에서부터, 즉 관계를 자각하고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관계와 인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식은 그것이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든 가장 밑바탕에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인식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사람의 위상이 한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후기 근대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금융자본은 그 축적 양식에서 완벽하게 사람이 배제되고 있습니다. 산업자본은 그나마 공장이 있고 노동자가 있고 그 뒤편에 노동자 가족이 있습니다. 금융자본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품이 누구를 어떤 지경에 빠뜨리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금융상품의 수익 통계치 이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유해 식재료가 어떤 식품에 들어가는지 그리고 그 식품들을 누가 소비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함마드 유누스총재는 사람을 먼저 봅니다. 그 사람이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꾸준히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성공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대출금 상환율이 95%를 상회합니다.
결혼을 앞둔 여인이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인간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답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답변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능력 있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많은 답변입니다. 능력이란 경쟁력입니다. 비정한 칼이기도 합니다. 편안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희로애락으로 인간입니다. 편안하게 일주일만 누워 있으면 어김없이 환자가 됩니다.
신영복/ ‘담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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