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맹자』 곡속장(觳觫章)의 ‘이양역지(以羊易之)’ 부분입니다. 양과 소를 바꾼다는 이야기입니다.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왕을 찾아가서 자기가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소문은 이런 것입니다. 선왕이 소를 끌고 가는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혼종하러 갑니다.” 혼종은 종을 새로 주조하면서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입니다. 아마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던가 봅니다. 임금이 “그 소를 놓아주어라”고 합니다. 신하가 “그렇다면 혼종을 폐지할까요?” “혼종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제를 지내라.”고 했던 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소를 양으로 바꾸라(以羊易之)고 지시한 적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바꾸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험담처럼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인색함 때문이 아니었던 것 역시 분명합니다. 맹자는 선왕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해 줍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맹자의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맹자』의 이 대목에서 생각하자는 것은 ‘본 것’과 ‘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차이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 곡속장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인간적 만남이 대단히 빈약합니다. 이양역지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시대의 인간관계와 사회성의 실상입니다. 언젠가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서 바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신도림역에 도착하자 내가 그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분이 얼른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앞에 서 있던 친구를 자기 자리에 앉히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에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이양역지였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의 정면에 서서, 누가 보더라도 그 자리에 대한 연고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불법적(?)으로 차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경우 없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만남의 부재’ 때문입니다. 그 여자와 나는 만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습니다. 서울 시민의 지하철 평균 탑승시간이 10정거장 20분입니다. 지하철 속의 만남은 20분이 지나면 끝나는 만남입니다. 맹자가 강조한 의(義)가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恥)입니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관계가, 만남이 지속될 때 생깁니다. 20분간이라는 만남은 부끄러움이 형성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얼마든지 남의 좌석을 불법(?)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線)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點)입니다. 더구나 장(場)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신영복 / ‘담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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