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水)은 우습지 않다
기자가 특종을 빼앗겼을 때 ‘물먹었다’는 표현을 쓴다. 하기야 기자에게 낙종은 ‘물고문당했을 때의 고통’과도 비견될 수 있다. 1980년대 말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물태우’란 별명이 붙은 적이 있다. 나약한 지도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물(水)은 그렇게 폄훼될 물질이 아니다. 예컨대 고 신영복 선생은 ‘노자의 철학=물의 철학’이라고 정의했다. 신영복 선생이 평생 삶의 가르침으로 삼은 <노자> ‘상선약수(上善若水)’ 구절을 보라.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잡는다(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故幾於道).”
공자 역시 물을 허투루 보지 않았다. 공자는 흐르는 물을 볼 때마다 ‘물이여! 물이여!(水哉水哉)’ 하며 감탄했다. 제자 자공이 이유를 물었다. 공자는 “사사로움 없이 두루 베풀고(德),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주며(仁), 낮은 곳으로 이치에 따라 흐르고(義), 낭떠러지도 주저 없이 떨어지기(勇) 때문”(<설원>)이라고 했다. 특히 <노자>의 ‘상선약수’ 구절에는 위정자들에게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강과 바다가 뭇 시냇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잘 낮추기 때문이다. 백성 위나 앞에 서려면 언어가 겸손해야 하고, 자신을 뒤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노자는 “약하고 부드러움의 상징인 물이지만 바로 그 물은 강함과 견고함을 뚫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물의 순리’에 거스르는 위정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순자는 노자(그림)와 공자의 ‘물의 가르침’에 무시무시한 말을 보탠다.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물은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고 한 것이다.
순자는 군주(배)가 백성(물)을 제대로 다스리면 순항할 수 있지만 인심을 거스르면 전복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요즘 고 신영복 선생처럼 물의 가르침, 즉 노자의 ‘상선약수’를 삶의 신조로 삼는 이들이 많다. 물처럼 부드럽고,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임한다니 얼마나 좋은 가르침인가. 다만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라면 명심할 게 있다. 물은 물론 순리에 따라 흐른다. 그러나 지도자가 물의 소통을 막는다면 둑이 터지고, 거센 풍랑에 천하를 잃는다. 노자, 공자, 순자가 전하는 물의 가르침이다.
이기환 논설위원(2016.1.27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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