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직선적 시간관과 원형적 시간관

송담(松潭) 2016. 4. 5. 18:25

 

 

직선적 시간관과 원형적 시간관

 

 

 

 시간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은, 시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전진해간다는 관점이다. 시간은 과거를 거쳐 현재를 지나 미래로 향한다. 그 방향은 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하다. 이런 생각은 매우 상식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탁자 위에 유리컵이 놓여 있다. 그런데 실수로 이 유리컵을 떨어뜨렸다. 유리컵은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유리컵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상태를 A라고 하고 산산이 부서진 상태를 B라고 한다면,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컵의 상태는 항상 A에서 B로만 향하지, 절대 B에서 A로 향하지는 않는다. 깨진 유리컵을 치우려고 빗자루를 들고 돌아왔을 때, 깨진 유리컵이 다시 탁자 위에 올라가서 붙어 있는 일은 없다. 이렇듯 시간은 앞으로만 나아가고 절대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시간의 불가역적 성질이라고 한다. 시간의 불가역적 성질은 시간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의 토대가 된다. 시간에 대한 첫 번째 관점, 즉 시간이 하나의 방향으로 전진한다는 관점을 직선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직선적 시간관에 대비되는 시간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시간이 순환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지옥 같은 아침 출근 시간.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회사에 도착해서 한숨 돌리면 곧이어 즐거운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점심을 먹고 지루한 오후 일과를 보내고 나면 해방 같은 저녁 퇴근 시간이 된다.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 상사 눈치 보며 일거리 좀 만지작거리다가 퇴근해서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오지 않기만을 바랐던 아침 출근 시간이 다시 찾아온다.

 

 왠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 밤을 지나 다시 아침이 된다. 시간이 앞으로만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일주일도 그렇고 계절도 그러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돌아온다. 물론 직선적 시간관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간이 되돌아오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앞으로 계속 전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겠지만, 그 봄은 새로운 봄이지, 예전의 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일요일 저녁이 되면 월요일 출근 생각에 불안해지기 시작할 것이고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봄옷을 준비할 것이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같은 패턴으로 시간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내일은 경험하지 않은 내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내일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되돌아오길 반복할 것이라는 관점을 원형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직선적 시간관은 서양의 문화와 종교의 밑바탕이 되었고 원형적 시간관은 동양의 문화와 종교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인간은 탄생하고 성장하여 죽음에 이른 후 영원한 세계로 나아간다. 어떤 사후세계에서나 시간은 과거로 후퇴 없이 영원히 계속된다. 반면 동양의 윤회사상은 원형적 시간관을 토대로 한다.

 

 이러한 시간관의 차이는 역사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이어진다. 우선 직선적 시간관은 역사는 끝없이 발전해간다는 진보적 역사관을 낳는다. 진보적 역사관에서의 역사는 직선적 시간관처럼 과거로의 회귀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며, 그 나아감은 어제보다 변화된 오늘이고 오늘보다 변화된 내일이다. 기술과 문명은 절대 후퇴하지 않고 발전해나간다. 스마트폰 다음에 삐삐가 다시 시장을 지배할 가능성은 없다. 인류의 점진적 발전과 진보에 대한 낙관이 진보적 역사관의 특징이며 서구사상의 근간을 형성한다.

 

 다음으로 원형적 시간관은 역사가 큰 틀에서 반복된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낳는다. 순환적 역사관에서의 역사는 발전과 진보를 지속하지 않는다. 대신 발전과 퇴보를 반복한다. 이것이 동양적 역사관의 특징이다. 동양에서의 혁명이 언제나 왕의 성씨가 바뀌는 역성혁명일 뿐, 백성들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볼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순환적 역사관이 구시대의 산물인 것만은 아니다.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자랑하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진 사람에게 순환적 역사관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어제는 삐삐, 오늘은 핸드폰, 내일은 스마트폰인건 인정한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과연 고려 시대의 사람들보다 오늘의 내가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몸에 걸치고 손에 쥐고 다니는 것은 변한 것 같지만,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사는 삶이란 무수한 시간을 반복해왔을 뿐, 그다지 발전한 것 같지는 않다.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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