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사르트르의 자유와 선택

송담(松潭) 2014. 12. 14. 17:45

 

 

사르트르의 자유와 선택

 

 

 

 

 실존과 본질이란 무엇인가?

 

 실존이란,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음이다. 지금 존재하고 있는 우리와 모든 우주만물은 실존자다. 본질이란, 무엇 무엇다움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것이고, 장미가 장미로서 장미다움이다. 나비가 나비로서 나비다움이다. 하지만 철수는 철수로서, 영희는 영희로서 모든 실존자의 자기다움은 100퍼센트 같을 수 없다. 장미라고 다 같은 장미가 아니다. 각자의 본질, 곧 자기다움에 있어서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나로서 나다움은 누가 만드는가? 하나님, 부처님, 아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주체는 오로지 나 자신이다. 나는 나다움이라는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기에 자유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내가 될 것인지 오로지 나의 자유선택이다. 선택의 가능성은 다양하게 열려 있기에 자유는 무한 개방성이자 가능성이요, 자기 긍정이다. 그런데 왜 나의 나다움을 나 스스로 만들어야 할까? 조물주가 만들어 주지는 않는 것일까?

 

 

 자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지금 이곳에 엄연히 실존하는 내 존재가 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의미는 우리 각자에게 실존이 주어졌을 때, 이미 존재는 백지상태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맨 처음 내 존재는 텅 빈 백지였다. 다른 말로 세계와 우주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 개방성이요, 무한 가능성이다. 무엇이든지 채울 수 있고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결국 의 의미는 절대 자기 긍정이다. 절대 자기 긍정이야말로 자유자체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자유는 인간 안의 운명이다.

 

 만약에 내 존재가 이미 꽉 찬 채로 내게 주어진다면, 당연히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담을 수 없다. 다행히 나는 누구인지, 나다움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조물주가 정해 준 것이 아니라, 실존의 순간부터 내가 정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긍정적으로 선택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나다움은 순전히 내 자유의지에 따른 내 책임이요 의무다.

 

 내 존재는 하얀 종이로서 세계와 우주만물을 향해 열려 있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따라서 노예나 로봇과 같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성과 적극성과 자기 긍정이 바로 무()인 존재의 바탕이요 근본이다. 내 존재가 백지상태인 무로 주어졌기에 인간인 나는 자유다. 나는 나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 즉 창조해 가는 존재다.

 

 

 가능성으로 자유로운 나 VS 자기 부정적인 노예의 나

 

 나의 실존과 본질과 자유가 삼위일체임을 도공에 비유해 알아보자. 주어진 내 실존은 자기를 빚는 도공이고, 내가 찾아갈 나다운 나의 본질은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도자기란 없었다. 도공이 차차 만들어 낼 것이다. 어떤 도자기를 만들 것인가? 신이 정해 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아닌 도공 자신이 정한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 누가 구상하고 누가 진흙을 파다가 물레를 돌리고 가마에 구워 낼 것인가? 도공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한다. 내가 자유로운 운명이 아니라면, 나는 누군가의 꼭두각시로서 기계적으로 물레를 돌리고 도자기를 만들어 가마에 구운 것이다.

 

 꼭두각시 역할 역시 나의 선택이다. 가능성으로 충만한 자유로운 도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기 부정적인 꼭두각시 도공이 될 것인가? 모두 나의 선택이다. 그렇게 자유는 내 운명이며, 내 인생은 100퍼센트 내 책임이다. 자유와 책임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나는 자유요 책임이다.

 

이승자 / ‘흔들리는 너를 위한 철학 테라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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