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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의 살아 있는 증거, 베르사유 궁전

송담(松潭) 2021. 11. 27. 10:59

유한계급론의 살아 있는 증거, 베르사유 궁전

 

 

 

앙리 4세가 문을 연 부르봉 왕가의 권력 중심지는 루브르 궁전이었는데, 루이 14세가 1682년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사를 했다. 파리를 버린 게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을 파리의 정치적 공간으로 포섭한 것이다. 루이 14세가 혼자 힘으로 궁전을 지은 것은 아니다. 안정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고 왕권을 크게 강화했던 할아버지 앙리 4세와 아버지 루이 13세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크고 값비싼 궁전은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이 보여주는 유한계급의 문화양식은 루이 14세 개인이 아니라 부르봉 왕가 전체가 창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통치했던 앙리 4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성격이 밝고 매사에 긍정적이었으며 군주로서 유능했다. 종교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위그노의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을 통합했다. 농민의 세금을 줄이고 귀족의 세금을 늘려 국가 재정을 확충했으며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고 상공업을 진흥했다. 백성들이 일요일에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노라 공언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그렇지만 앙리 4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바람둥이 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부르봉가의 가풍에 대해서는 앙리 4세의 경우만 구체적으로 말하고 나머지는 생략한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루이 0세의 여자들'을 검색해보기 바란다. 앙리 4세는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핑계로 삼아 다른 여자들을 가까이했다. 왕의 혼외 자녀를 셋이나 낳고 또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인을 포함해 평생 수십 명의 여인과 어울렸다. 그런 와중에 재혼한 왕비 마리가 왕세자를 낳았다. 그 아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데 앙심을 품은 가톨릭 광신자가 앙리 4세를 칼로 찔러 죽였다.

 

마리 왕비는 어린 왕 루이 13세를 섭정하면서 정치를 잘못해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 그러자 앙리 4세 때 특권을 빼앗겼던 지방 귀족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열여섯 살에 어머니의 섭정을 거부하고 친정을 시작한 루이 13세는 추기경 리슐리외를 총리로 기용해 귀족계급의 반발을 잠재웠다. 개신교를 억압해 종교 갈등을 재발하게 만든 것을 빼면 선왕의 정책을 대부분 충실히 계승했으며 상업과 해운업을 장려하고 해외 식민지를 획득하는 데 열성을 보였다. 그렇지만 열심히 일하는 왕은 아니었다. 정치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고 사냥을 즐겼다. 열다섯 살에 두 살 어린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공주 안 도트리슈와 혼인했는데, 왕비보다는 왕비의 시녀들을 더 챙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왕비가 혼인 22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다섯 살이었던 1643년, 마흔두 살이었던 루이 13세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루이 14세는 다섯 살에 왕이 되어 72년 넘게 재위함으로써 유럽 군주제 역사의 최장 재위 기록을 세웠다. 이탈리아에서 온 추기경의 섭정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서 친정을 펼쳤던 그는 불타는 야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모순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밖에서는 큰 전쟁을 세 번이나 벌여 영토와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안에서는 예술가를 후원하고 문화 발전을 북돋웠다. 왕권을 신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국가 그 자체인 양 절대 권력을 휘둘러 프랑스의 봉건제를 사실상 해체했지만, 귀족들이 반역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죽을 때까지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가 20년 동안 지었지만 아직 미완공 상태였던 베르사유 궁전으로 서둘러 이사하면서 파리와 지방의 귀족들을 모두 그곳으로 불러 모은 것도 바로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안내서는 건축 과정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궁전과 정원을 만든 과정과 방법을 알면 그곳에서 미학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리라.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면에서 전제군주제의 폭력적 본성을 증언한다. 루이 14세는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없앤 앙리 4세의 칙령을 폐지했다. 그러자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때문에 개신교도 수십만 명이 종교적 관용이 있는 주변 국가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가 많아서 프랑스의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파리를 비롯한 도시의 거리에는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 즐비했지만, 잦은 전쟁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바닥을 보인 탓에 정부는 적극적인 빈민 구제 사업을 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을 강제 동원해 공사를 벌였다.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으면 아무 보상도 하지 않고 묻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지은 호화 궁전에 귀족들을 불러 모아 사냥과 승마, 당구와 춤을 즐겼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던 그가 태양신 아폴로 역으로 공연에 출연한 일과 관련이 있다. 그는 171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증손자에게 후회가 담긴 유언을 남겼다. “전쟁을 피하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라.” 루이 14세의 자녀와 손자들이 대부분 천연두와 홍역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가 증손자에게 바로 내려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70년 넘게 재위했던 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난 루이 15세는 열네 살에 친정을 시작했는데, 성격은 증조부와 반대였고 능력은 그만 못했다. 영토 확장 야심은 크지 않았지만 세 차례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려 국가 재정을 파탄 내고 많은 해외 영토를 잃었다. 하지만 독일 접경 로렌 지역을 병합하고 이탈리아 중부 앞바다 코르시카를 사들여 영토를 조금 넓히기도 했다. 소심하고 인정이 많은 편이었으며, 화려한 의전보다는 개인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친애왕' 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인기도 있었다.

 

하지만 두드러진 정치적 무능과 선왕들을 능가한 엽색행각으로 결국은 민심을 잃고 말았다. 대혁명으로 목이 잘린 왕은 루이 16세였지만, 부르봉 왕가의 파멸을 초래한 원인 제공자는 루이 15세였다고 해야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루이 15세는 심한 우울중에 시달리다가 1774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아들이 먼저 같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열여섯 살 먹은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루이 16세가 되었다.

 

루이 14세가 루브르 궁전보다 더 좋은 집을 짓고 사는 지방 귀족을 보고 화가 나서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웃 나라의 왕궁을 이겨 먹으려는 경쟁심을 가졌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경 전문가, 예술가들을 동원해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저지대에 50년 동안 이 궁전을 지었다. 숲과 호수를 만들고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대형 토목공사를 벌였을 뿐만 아니라, 건물 벽에 박은 못의 머리까지 장식할 정도로 사치를 부렸다.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집이니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게 당연하다.

 

궁전 내부에 일단 들어가고 나면 별로 고민할 게 없다. 일방통행로를 따라가면서 모든 것을 강제 관람해야 한다. 대충 보느냐 오디오가이드를 켜고 찬찬히 보느냐,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정말 잘 그렸다 싶은 천장화,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크고 높은 침대가 놓인 왕과 왕비와 왕자와 공주들의 침실, 방마다 걸린 왕과 왕족의 초상화, 남자들이 당구를 치고 카드 게임을 했다는 오락실, 여자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던 살롱은 사생활 공간이었다.

 

국무회의를 연 회의실과 경호원들의 방,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이 있는 방, 아폴론 이름이 붙은 루이 14세의 접견실, 왕을 알현하는 사신과 귀족들의 대기실, 인기 최고인 '거울의 방'은 넓은 의미에서 공적 공간이었다.

 

내가 제일 눈여겨본 곳은 궁전의 서쪽 회랑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거울의 방' 또는 유리의 방'이다. 길이가 70미터 넘는 이 방에는 창문 17개와 거울 578개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세어보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뒤편 십자형 인공 호수(또는 운하)와 좌우 정원, 원래의 1/10밖에 남지 않았다는 숲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실내에 있는 물건 중에서 관람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황금 촛대라고 한다.

 

베블런이 주로 정치, 전쟁, 종교 분야에 활동한다고 한 유한계급은 베르사유 궁전의 수많은 방 가운데 이곳을 제일 좋아했다. 이 방을 차지했다는 것은 곧 베르사유 궁전과 프랑스를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프로인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71년 이 방에서 독일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대표들이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한 장소도 이 방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을 때 베르사유에 있었던 루이 16세는 15년 재위 끝에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그는 성격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했으며 정치와 행정에 무능했다. 그러나 특별히 목이 잘릴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기는 어렵다. 좋지 않은 시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왕좌에 있었을 뿐이다.

 

루이 16세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협조를 받아 왕실의 재정을 확충하겠다는 헛된 희망에 끌려 루이 13세 시대 이후 160년 동안 잠자고 있었던 신분제 의회를 소집했다가 대혁명의 불씨를 제공했다. 민중의 궐기가 입헌군주제 운동으로 번지는 사태를 막으려고 군대를 동원했지만 오히려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광야를 태우는 불처럼 혁명이 번져나간 데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제국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라는 사실도 작용했다. 오스트리아제국이 주변국 군주들을 부추기 동맹을 형성하고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민중은 왕비가 ‘오스트리아 간첩'이라고 욕하면서 적개심을 터뜨렸다.

 

‘과시적 소비'의 전형이었던 베르사유 궁전과 부르봉 왕가의 생활방식은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던 유럽 군주정 국가의 유한계급에게 널리 퍼져나갔다.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저마다 베르사유를 본뜬 짝퉁 궁전을 지었으며, 부르봉 왕가의 의상을 흉내 내고 프랑스말을 배웠다. 이슬람 세계의 맹주였던 오스만제국 황제가 보스포루스해협에 짝퉁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파리의 패션산업이 그것 때문에 흥했던 것은 아니다. 대혁명으로 문명사의 새 시대를 연 프랑스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존중하는 정치제도와 사회풍토를 형성하고 역사가 남긴 문화자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1’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