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사진은 시간을 가두는 예술

송담(松潭) 2021. 11. 16. 04:38

 

사진은 시간을 가두는 예술

 

 

 

“시간 앞에 서글프지 않은 것은 없다.”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의 명언이다. 시간을 묻힌 모든 것은 아름답다. 시간은 기억이며 잡을 수 없는 환영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늙는다. 잔인한 시간은 스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한때 벌어진 일들은 시간과 싸우지 못 한다. 일일이 혼적을 남기기엔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간다.

 

강운구 선생의 사진을 보면 그가 무엇을 찍고자 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는 평생 서글픈 대상을 항해 카메라를 겨웠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이 땅의 풍경을 담았다. 대단할 것도 그렇다고 폄하할 것도 없는 이 나라 백성들과 마을은 사각의 프레임에 고정되어 희미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그렇게 남은 우리나라의 옛 시간은 애달픈 아름다움이 되었다. 그의 사진은 '우리가 이렇게 살던 시절이 있었어.'라는 회한을 그 시절을 겪은 이들이나, 겪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불러일으킨다.

 

나는 간혹 옛 사진들을 꺼내본다. 사진 속에서 나를 업고 있는 어머니는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포대기로 허리를 짜맸다. 앳되어도 너무 앳된 모습의 어머니. 나이를 헤아려보니 채 서른 살도 되지 않았다. 나에게 그 검정 고무신과 포대기의 기억이 있을 리 없다. 앳된 얼굴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사진은 나에게 깊은 감흥을 남긴다. 그리고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사진은 너무나도 선명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혼적을 남길 수 있다면 잊히지 않는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동굴에 그토록 힘들게 자신들이 사냥한 동물의 모습을 새겨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적은 시간에 맞설 유일한 대응이 된다. 사진은 시간 앞에 스러질 모든 것의 운명에 맞서, 그 모습을 남겨두는 것으로 위안을 주는 예술이다.

 

그래서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이 있는 것이다. 사진은 시간을 통째로 담아두는 재주를 부리기에, 그 순간의 진실이 담겨있다. 화장 너머의 앳된 얼굴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 아무리 세련되게 차려입었어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묻어 있다. 연예인들의 몇 년 전 사진을 볼 때의 당혹감도 다르지 않다. 이상하게 촌스럽고 어색하다. 달라진 시대와 흘러간 세월의 변화에 비추어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찍었을 때의 시간과 볼 때의 시간 격차가 점점 커지면 사진은 또 한번 변화한다. 시간이 오래되면 사진은 어떤 고유성을 만들어낸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명작이 되는 것이다. 거장의 사진이 시간이 흘러도 낡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시대의 시간성을 압도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진을 감상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바로 그 사진이 가둔 시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진을 찍던 사람이 존재했던 시간. 사진에 찍힌 사물, 인물, 풍경이 존재했던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시간대의 시선을 내 눈에 장착하고 사진을 들여다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새로운 감흥이 올라온다. 오늘의 눈만으로 과거의 것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이다. 그런 눈으로는 많은 것을 발견해낼 수 없다. 사진이 가두어낸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사진기 밖에 있었던 것들을 상상해보는 것. 그리하여 그 이미지가 붙들어놓은 시공간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사진의 미학을 대하는 태도이다.

 

 

사진 <윤광준>, 출처 : 중앙일보 2016.4.11

 

* 위 사진은 윤광준의 작품이지만 글에 나온 어머니 사진이 아닙니다.

검정 고무신이 아닌 샌달을 신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해당 사진을 찾으려고 했지만 실력이 부족해서 못 찾았습니다.

 

 

< 2 >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치밀한 계산

 

 

사진이 순간의 시간을 가두는 선택의 예술이기에 갖게 되는 편견이 있다. 찍는 사람이든 보는 사람이든 사진을 '우연'이라고 대하는 태도가 은연중에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좋은 사진일수록 많이 생각한 계산의 산물이다. 사진을 ‘우연'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사진을 찍는 데도 감상하는 데도 한계를 만든다.

 

그림, 조각, 음악, 춤 등 모든 예술에서 사람들은 상대의 의도성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반면 사진에서는 그런 의도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사진은 단 한 번뿐인 공간과 시간의 동조를 우연처럼 보여준다. 하지만 '우연처럼'이지, '우연'이 아니다. 사실 우연은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이유가 있기에 가능한 행운이다. 정말 좋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다시 오지 않을 극적인 순간을 계산해야 한다.

 

일본 황실의 정원을 관리하던 정원사가 있다. 한 사업가가 그를 초빙해 새로 조성할 정원의 돌 놓는 일을 맡겼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루 종일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돌 놓을 자리를 보고 있었다. 돌을 한 점 놓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의자에 앉아 보기만 했다. 가끔 손을 들어 인부들에게 놓인 돌의 위치와 방향, 높이를 바꾸계 했다. 다음 할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저쪽을 돌며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같은 일을 석 달째 반복하며 돌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작업은 답답하고 더뎠다. 일을 발주한 이의 원망이 얼마나 컸을까. 긴 시간이 지나 드디어 돌 놓는 일을 마무리되었다. '정원에 놓인 돌의 역할이 크면 얼마나 크랴.'라고 생각했다. 계절이 바뀌고 낙엽이 진 정원의 색깔이 달라져 있었다. 튀어나온 돌의 질감과 색깔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러웠다. 더도 덜도 말고 그 자리, 그 크기, 그 높이에 있어야 하는 돌과 주변의 조화는 놀라웠다. 겨울이 왔다. 다시 그 정원에 가보았다. 눈에 덮인 돌이 솜사탕처럼 회고 부드러워 보였다. 눈이 녹고 봄이 왔다. 봄비에 젖은 돌은 물속에서 숨을 쉬는 물고기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서로의 간격과 솟아나온 면적의 대비는 카메라의 프레임으로 잘라내면 또 다른 작품이 될 듯싶었다. 그제야 돌 하나 놓는 데 긴 시간이 걸린 이유를 수긍한다.

 

그에 비해 찍은 사진이 어떻게 보이고 전달되는지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낫다. 어떻게 보일지 모르고 찍었으니, 자신의 사진에 대한 설명이 많아진다. 분명 잘 찍은 사진인데 이상하게 피곤함이 느껴지는 사진들은 무언가를 자꾸 설명하려 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장면이 정말 멋지지 않냐는 구구절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일부러 설명해야 하는 것들은 공감되기 어렵다. 폭발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사진은 명료하다. 그 사람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선택의 눈을 보여주는 사진, 디테일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진,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만들어낸 깊이와 완성미를 보여주는 사진. 이런 사진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 뒤에는 명료한 감동을 만들기 위해 들였던 치밀한 계산이 있다. 어쩌다 한 번의 성과는 낼 수 있다. 하지만 원할 때마다 바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실력이다. 모든 세련은 지루한 반복과 연마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 3 >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사물의 세밀한 모습,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던 움직이는 모습을 한순간에 잡아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것을 잡아내려고 애쓴 사진, 세상의 허무함과 삶의 쓸쓸함을 드러내려는 사진을 보면,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게 사진의 본연적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

 

사진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사람이 평소 보던 것과 달리 기계의 눈인 렌즈는 세상을 다르게 묘사할 가능성이 컸다. 카메라의 눈이기에 가능한 과감한 클로즈업, 부분을 잘라내는 일,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극단의 시선 등이 가능해졌다. 사진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변화의 과정은 바로 시선의 확장이다. 그림이 보여주지 못하는 과감하고 신선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 사진의 미학이다.

 

 

< 5 >

 

웬만큼 공들이지 않은 바에야 사진기로 찍은 사진과 스마트폰 사진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일상에서 필요한 재현의 퀄리티는 더 이상 요구할 게 없을 정도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모두가 수준 높은 재현의 도구를 지니게 된 셈이다. 당연히 화질이 아니라 차별적 내용과 메시지가 부각되는 사진으로 관심이 옮아간다.

 

이렇게 쉬운 사진 찍기를 경험한 사람들이 의문을 품게 됐다. 똑같은 카메라로 같은 장소를 찍어도 찍는 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기술의 영역일 것 같은 사진이 예술이 되는 출발점이 바로 이 의문이다.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똑같은 스마트폰으로 똑같은 대상을 찍는데, 누구는 왜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낼까. 놓여 있는 조건은 같은데 만들어낸 '무엇'이 달라지는 건 사진이나 미술이나 같다. 기계를 사용한다 해도 나오는 결과물은 한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에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왜 우리가 사진을 예술로 받아들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창조성이 작용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 6 >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마주하고 그 감흥에 푹 빠지면 내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 위대한 사진도 그렇다. 전혀 다른 눈의 선택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밝고 화사한 이미지라고 해도 그 본질은 도발이고 충격이다. '세상을 이렇게 다르게 볼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욕망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눈을 가지려면, 세상에 위대한 눈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브라질의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극한의 상황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존엄한 시선으로 기록한다.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하며 땀으로 찍어낸 사진은 영화로도, 문학으로도 풀어낼 수 없는 진한 메시지를 준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살갗에 햇볕의 따가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섬세하고 강렬한 질감이다.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깨닫게 한다. 그의 사진을 보면 이런 질문이 들린다. ‘당신이 보고 있는 건 무엇인가’ 그 질문 앞에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사진들은 항상 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그 질문을 또 듣기 위해 사진전에 가고, 답을 찾기 위해 사진기를 든다. 정답이 없다는 것만이 위안이다.

 

 

< 7 >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힘이 생기면 인생이 달라진다.

 

 

윤광준 / ‘심미안 수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