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공이 굴러간 곳에서 니체를 다시 만나다

송담(松潭) 2021. 10. 2. 17:03

공이 굴러간 곳에서 니체를 다시 만나다

 

 

 

그늘 속 어른과 빛 속의 어린아이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 그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그림이 있다. 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의 공<Le Ballon>, 사선으로 나뉜 구도를 따라 화폭에는 두 가지 세계가 펼쳐진다. 그림자의 세계와 빛의 세계, 정(靜)의 세계와 동(動)의 세계,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그림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있다. 뒤로는 푸른색과 흰색의 긴 옷을 단정히 입은 여성들이 보이고, 앞쪽으로는 팔락거리는 짧은 옷을 입은 한 소녀가 보인다. 어른들이 선 곳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이 어른들은 나무처럼 서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쪽에 조그맣게 배치된 탓에 그 소리가 더더욱 들릴락 말락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와 대비되는 밝은 빛의 공간에 아이가 있다. 타닥타닥, 발자국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생동감, 흰옷에 노란 모자를 써서 더욱 시선을 끄는 아이는 빨간 공을 쫓아 활기차게 달리고 있다. 공이 아이고 아이가 공이다. 공처럼 굴러가는 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이. 그림자는 점점 아이를 삼키려는 것처럼 보이고 아이는 그로부터 달아나려는 듯도 보인다.

 

아이는 공 그 자체다. 동그랗고,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통통 튀어가는 발랄한 물건. 발로통은 빨간 공 안에 흰 점을 콕 찍어 반짝이는 빛과 윤기를 표현했다. 저 빨갛고 탐스러운 공처럼 이들에게선 늘 윤기가 난다. 윤기를 잃은 중년의 나는 세탁기에 여러 번 돌려진 빨래 같다. 하루하루 색이 바래가는 모습에 거울을 보는 일이 가끔은 슬프다. 하지만 아이들의 윤기는 깊은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느낄 수 있다. 탐스럽게 매끈거리는 머릿결과 보드랍고 탄력 있는 볼, 생명의 윤기란 것이 이런 것인가 싶다.

 

이토록 건강하게 빛나는 아이들, 하루하루 온몸으로 삶의 찬가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주목한 철학자가 있다. 두텁게 드리워졌던 근대의 커튼을 열어젖혀 현대라는 무대에 조명을 비추기 시작한 인물, 바로 니체다. 가끔 생각한다. 계몽과 진보라는 시대정신이 우산처럼 씌워져 있던 근대는 어쩐지 부모 같고, 그게 싫다고 우산을 팽개치고 뛰쳐나간 현대는 알록달록한 이이들 같다고.

 

 

무언가를 뛰어넘은 자

 

위버멘쉬 Übermensch 라는 이상한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인간형이다. 일본어 번역 때문에 오래도록 초인이라는,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셔야 할 분 같은 단어로 잘못 불렀다가 그 뒤로는 오버맨 Overman이라는, 격렬한 오버로 상대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능력으로 저스티스 리그에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도 불렸다가. 이제 학계에서는 대체로 위버멘쉬라는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극복인이라는 좋은 용어도 등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극기복례의 성리학적 분위기가 풍겨 어쩐지 쓰기가 저어된다.

 

위버멘쉬는 말 그대로 뭔가를 넘어선uber 사람Mensch이다. 우리를 둘러싼 기존의 통념이나 도덕 같은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긍정적으로 창조해내는 사람, 니체의 다른 저작에서는 '주인', '정신적 귀족', '주권적 개인' 같은 표현으로도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뜻이다.위버맨쉬는 바로 이런 신과 같은 초월자 없이도 스스로 건강하고 의미 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인적인 인간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널리 알려진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의 비유다. 낙타는 가장 밑바닥의 존재, 노예 같은 존재다. 자신의 것도 아닌 남의 짐을 고집스럽게 짚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타 같은 삶을 산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왜'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왜 이런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왜 이런 것들을 따라야 하는지, 세상의 곳곳에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심과 반성적 사유를 통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훌훌 내던지고, 바람 같은 자유를 얻은 사자로 한 단계 고양되는 이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큰 소리로 불호령을 내리며 세상을 향해 No!를 외치는 사자에서 멈춘다면 그냥 세상 모든 것에 가위표를 그리는 엑스맨이 되거나 세상만사 부질없는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파괴와 부정의 정신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만물을 유쾌하고 성스럽게 긍정하는 어린아이의 단계로 한 차원 더 나아가야 한다. 비록 파도에 허물어지더라도 끊임없이 모래성을 쌓으며 즐거워하는 아이, 생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늘 긍정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아이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전형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그리하여 니체는 모든 사람에게 위버멘쉬가 되라고, 아이가 되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허물고 부수고 또다시 쌓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하며 즐거워한다. 조그만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이 세상의 공기를 흠뻑 마시며 누구보다 삶을 긍정하고 하루하루에 충실한 존재들이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내세의 개념도 초월자의 개념도 희박하다. 아이들을 위한 예쁜 그림책을 만드는 한 작가님과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슴에 들어와 박힌 그분의 말이 있다. 아이들은 ‘지금을 사는 존재’라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금을 사는 존재, 그들이 바로 위버멘쉬다.

 

발로통의 그림 속 어른들은 그림자의 무거움에 짓눌려 있다. 그림 속 왼쪽 공간은 낙타의 구역이다. 하지만 아이는 대조적으로 바람처럼 가벼워 보인다. 짐을 내던진 사자처럼 흘기분하고 가벼워 보일 뿐 아니라 공을 쫓아 경쾌하게 뛰고 있다. 순진무구함이며, 망각, 새로운 출발, 놀이, 성스러운 긍정,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렇게 니체의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아이처럼 당최 해석하기 어려운 잠언 같은 글을 쓰고, 아이처럼 자기 자랑에 거침이 없었던 철학자의 얼굴이 저 빨간 공 위로 겹쳐 보였다.

 

이진민 /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중에서

 

 

< 참고 자료 >

 

Félix Vallotton (1865 - 1925)

 

팰릭스 발로통은 스위스에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나비파 화가이다. 그는 본래 목판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나비파에 합류하면서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강렬한 색상을 많이 사용하는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 그림마티스적인 그림때로는 달리를 연상하게 그림 등다양한 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나비파(Les Nabis)19세기말 팽배해진 물질주의의 한계와 색채분석에 의존하여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파의 작품에 싫증을 느끼고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여 자신의 사색을 화면에 전개하였다.

 

미술에서 색채는 사물의 원래 색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고갱의 관념에서 나온 나비파는 표현의 단순화를 통해 그 속에 영원성을 부여하였으며 굵은 윤곽선을 통해 장식적 기법을 차용하였고, 20세기초의 추상과 비구상 미술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출처 : 박상하의 음악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