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이진민 /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중에서

송담(松潭) 2021. 9. 29. 09:35

< 1 >

 

철학과 미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미술 작품들이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고? 미술은 언어 예술이 아닌 시각 예술이라서 우리에게 '생각' 보다는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죠. 하지만 사실 우리는 미술을 볼 때 생각에 잠깁니다. 작가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이 그림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제목을 보고, 작품을 다시 보고, 찬찬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작품을 눈에 담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서는 엄청난 이야기가 뻗어나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미술관에서 생각을 합니다. 철학자의 잠언을 곱씹으면서 생각에 잠기듯 미술가의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그림은 대체로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좋은 생각의 도구가 됩니다. 그림 한 장으로 우리는 머릿속에서 우주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해석하는 순간 누구나 철학자가 됩니다. 이렇게 철학과 미술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사유하게 만드는 데 그 아름다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철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논의가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모호하게 느껴지는 개념들을 벽돌 삼아 쌓아가는 논리의 성입니다. 벽돌 자체도 쥐기 어려운데 그걸 가지고 엄청난 성을 쌓아놓았죠. 우린 대체로 그 성에 들어가기가 싫습니다. 긴 글보다는 짧은 동영상이 우리의 이해를 직관적으로 돕는 시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으로 큰 건물을 지으려고 하다 보니, 소주 반병을 콸콸 들이켜도 없던 두통이 철학책을 펼치면 우리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거죠.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얘기가 아닌데 소통 방식에서 크게 감점을 당하는 게 철학입니다.

 

그런데 미술이라는 눈에 보이는 스위치를 통해 우리가 머릿속에서 철학적인 집 하나를 지어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 스위치로 인해 집짓기가 좀 더 쉽고 재밌어지지 않을까요? 회색으로 느껴지는 철학에 온갖 색이 반짝이는 미술이 겹쳐지면 철학이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 2 >

 

천지창조를 바라보는 발칙한 시선

 

 

 

이 그림은 곁에 두고 철학적 영감을 좀 얻어볼까 싶어서 내가 방에 걸어뒀던 첫 번째 그림이다. 학교에서 포스터 세일을 하기에 한참을 뒤적이다. 이 그림을 집어 들었다. 아담과 신의 손가락이 서로 만나는 부분이 크게 확대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천장화 〈천지창조>중 아담의 창조 일부분을 잘라 인쇄한 포스터였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전지전능하며 무한한 존재인 신, 그에 반해 능력도 존재 자체도 유한한 인간, 신에 대한 사유는 늘 인간을 사유하는 데 깊이를 더해주었고, 신과 인간의 만남이 어떤 곡선을 그리는가에 따라 서양문화권에서는 역사를 큰 덩어리로 잘라 나누었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대와 그 이후, 그 구분은 철학에도 반영되어 서양철학도 신과 인간의 구불구불한 관계 곡선에 따라 시대가 구분되곤 했다.

 

두 손을 찬찬히 살펴보자. 왼쪽은 손에 부드럽게 힘이 빠져 손목이 여유롭게 꺾여 있다. 힘을 빼고 그저 팔을 가볍게 들어 올린 느낌이다. 반면 오른쪽 손에서는 상대의 손끝에 가 닿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손목에도, 검지 끝에도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손끝과 상대 쪽으로 향하고자 하는 열의가 가득한 손끝.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신일까?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여유가 엿보이는 쪽이 신, 그리고 절대자에게 가 닿으려는 열망이 가득한 쪽이 인간 아닐까?

 

아니다. 왼쪽이 인간이고 오른쪽이 신이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아담은 야트막한 둔덕에 비스듬히 편안하게 누운 자세로 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고 있다. 우측의 힘 있는 손가락의 주인공이 바로 신인데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신의 수염과 옷, 천사들이 걸친 천이 나부끼는 방향으로 보아 아담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담이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데 반해 신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고 근엄하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 즉 신에게 가 닿으려고 간절히염원하는 인간과 그를 부드럽게 포용하는 신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유유자적한 쪽은 아담이고 의지와 열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쪽은 신이다. 아담의 저 여유로운 자세는 사방침 위에다 한 팔을 걸치고 보료 위에 느긋하게 누운 조선시대 양반님네들의 자세와 비슷하다. 아담의 오른손에 곰방대를 스윽 꽂아주면 딱일 것 같지 않은가. 여유롭고, 누구에게 꿀릴 것 없는 자세, 경외하는 신 앞에 자리한 인간의 자세치고는 좀 건방져 보이기도 한다. 미켈란젤로는 신과 그가 창조한 첫번째 인간이 만나는 순간을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1512

 

 

천지창조를 바라보는 두 가지 해석

 

내 머릿속에는 굉장히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이 뻗는다. 하나는 신의 권위를 오롯이 인정하는 해석이다.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어린아이 같은 존재, 그저 무지하고 유순한 한 마리 동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순수한 표정에 다소 건방져 보이는 저 편안한 자세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 신이 그림을 그리기 전의 빈 캔버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갓 태어난 아기 같고 한 마리 동물 같은 인간에게 신은 애써 날아가 이성과 지성, 도덕 감정 같은 고귀한 것들을 부여하려고 한다. 인간을 동물보다 한 차원 높은 존재로 만들어주고자 손끝에 힘을 주는 열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으로 그림을 보자면 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마치 부모님 같은 신의 사랑과 희생에, 감사의 마음이 몽글몽글 우러나는 느낌. 이런 방향의 해석이 미술사적으로는 널리 통용되는 해석인 듯하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발칙한 해석도 가능하다.‘ 여유로운 인간, 받아들이는 인간’ 대 ‘애쓰는 신, 찾아가는 신’의 대비를 좀 더 극한으로 끌고 가면 ‘인간 세상에서 신의 존재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만들고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된다. 이런 사고에 따르면 신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인간의 상상과 염원이 만들어 낸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커다란 돌이며 오래된 나무며 힘센 곰 같은 것들을 경외하여 그들에게 주술적 힘이 있다고 믿었고, 그런 믿음이 좀 더 세련되게 구체화된 것이 고대 신화이며, 현재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로서의 유일신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의 산물이라는 사고다. 말하자면 나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며 애써 인간을 찾아와 손가락에 힘을 주어 팔을 뻗는 신인 것이다. 이런 해석 안에서 신의 권위는,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낡고 초라한 자신의 옷 위에 화려한 외투를 빌려 걸친 배우처럼 멋쩍고 군색하다.

 

철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로 알려졌거나 무신론자라는 의혹을 받았던 이들이 많다. 소크라테스 Socrates는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해 결국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 홉스Thomas Hobbes는 당대부터 무신론자라는 의혹을 받았고 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홉스는 종교의 본질을 밝음이 아닌 어두움으로 설명한다. 고귀하고 긍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공포’ 같은 부정적인 말로 종교를 설명한 것이다. 종교는 미신이든 그 본질은 같지만 다수가 공적으로 인정하면 종교, 그렇지 않으면 미신이라는 건데 참 어마어마한 얘다. 거칠게 말하자면 기독교와 무속 신앙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는데, 시쳇말로 쪽수가 많아서 종교라는 얘기다. 그러니 당대의 교계에서 얼마나 기가 찼을 것인가, 볼테르voltaire도 이런 발칙한 해석에 슬쩍 한몫 거든다. 볼테르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을 발명했을 것이라고 했다.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는가

 

‘신에게 도전하기’ 종목이 있다면 그 어떤 철학자든 제치고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할 이 분야의 최고봉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잘 알려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는 집단최면을 통해 빛나는 내세를 만들어둔 대신에 우리가 사는 현실을 시궁창으로 바꿔두었다.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끝없이 학대 (원죄의식이라는든가 금욕주의) 하면서 이것이 바로 선이며 자유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간 인간 이성이 쌓아온 자유의지라는 것은 사실 이런 허위의식을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착각이며 그것은 자학에 불과하다.

 

니체는 그 넘치는 전투력으로 저작을 참 많이도 남겼는데 그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소설이 있다. 그 속에 ‘영원회귀’Eige Mictaturn, eternalreauti 라는 게 등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잘 짜인 인과의 사슬이라고 생각하며 잘 참고 견디면 내세에는 어떤 보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현실 세계는 같은 것이 랜덤하게 되풀이되는 카오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저 기존의 것들이 반복적으로 순환될 뿐이다. 그럼 그냥 아이고 망했구나, 인생사 허무하구나 하고 주저앉을 것인가. 그게 아니라 니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삶을 사랑하라’ amour fati 는 김연자 언니의 아모르 파티를 선언한다. 우리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삶을 영원히 반복되어도 만족스러울 만한 아름다운 삶으로 한 차원 고양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 라는 니체의 말은 단순히 가벼운 무신론 선언이 아니라, 수천 년간 쌓아온 인간 이성과 도덕률에 대한 묵직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니체가 비록 기독교에는 망치를 들고 덤볐어도 예수님 앞에는 꽃을 놓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니체에게 신은 사망선고의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은 경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고통은 니체에게는 긍정적 에너지였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니체는 인류 역사상 진정한 크리스천은 단 한 사람이었고 그는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만들어진 천국의 이야기를 믿으며 한평생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대다수 인간들의 삶은 나약하고 우매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말한다. 신은 죽었으므로 신의 위치를 항하여 스스로를 드높이는 삶을 살라. 영원회귀의 깨달음 속에서도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춤추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아담에게 없어야 할 것이 있다

 

처음으로 스스로 마음먹고 열심히 골라서 사온 포스터가 아주 흡족했던 나는 그 그림을 당시 활발히 사용하던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그러자 고국에 있던 한 후배가 그림 안에 틀린 점이 있다며 한번 찾아보라는 댓글을 남겼다. 책을 읽으시는 분들도 찾아보시길. 아담에게 없어야 할 것이 있다.

 

다들 찾으셨는지, 바로 배이다. 성경에 나온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 넣으셨다면 애당초 별 기능도 없는 배꼽을 만드셨을 리 없다. 배꼽은 자른 탯줄이 떨어진 흔적, 즉 사람이 어머니로부터 피와 살을 받아 나왔음을 보여주는 기관이다. 미켈란젤로가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배꼽을 그려 넣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명백한 실수다. 그러나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배꼽은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유쾌한 선언이다. 실수가 아니라 화룡점정이 되는 셈이다. 배꼽을 정면으로 드러낸 채 ‘나는 인간이다’ 과시하면서 손가락을 뻗어 신을 자기 쪽으로 불러들이는 모습, 니체는 과연 이 그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천지창조가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은 가톨릭 교계 제일의 어른인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conclave 가 열리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그 안의 그림, 그것도 가장 높은 곳에 그려진 천장화를 보면서 교황님께 꾸지람 들을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라니. 아무리 철학적인 상상이라지만 죄송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교황님께선 천지창조를 바라보는 이 천지개벽할 시선에 그저 조용히 웃으실 것 같다. 그런 모든 생각을 받아 안는 바다 같은 포용의 마음이, 수 세기에 걸쳐 이어진 그런 무수한 도전에도 종교의 가치를 꿋꿋하게 이어온 힘이 아닐까.

 

 

< 3 >

 

주먹질하는 예수님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정의보다는 불의에, 자유보다는 공포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상 멋진 철학자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주디스 슈클라 Judith Shklar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학자는 아니지만 유대계 여성 철학자이자 정치학자로서는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못지않게 중요하고 탁월한 학자다. 아렌트는 프린스턴 최초의 여성 교수, 슈클라는 하버드 정치학과 최초의 여성 교수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자들로 환불 원정대를 꾸린다면 가장 먼저 영입하고 싶은 언니가 슈클라다.

 

실제로 아렌트의 글이 문학적 향기가 있는 편이라면 슈클라의 글은 화려함 없이 핵심을 바로 찌르고 거침없이 똑 부러지는 편이다. 아마 이 언니가 이상이 아닌 현실에, 선이나 미덕이 아닌 악과 공포에 더 주목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상이나 선을 얘기하려면 예쁜 색도 칠해야 하고 꽃도 좀 꽂아야 할 테니, 그런 면에서 주제를 더 돋보이게 하는 문체랄까. 1970년대 이후 존 롤스가 정의justice라는 개념을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중심으로 다시 끌어온 이후 제도며 권리 중심으로 소위 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같은 하버드 교정에서 롤스와 가장 치열하고 따뜻하게 논쟁했던 이가 바로 주디스 슈클라다. 롤스에게 끊임없이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 안 된다고.

 

참고로 롤스와 슈클라는 둘 다 자유주의지다. 같은 자유주의를 고민하면서 롤스는 정의를, 슈클라는 불의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정의는 모호하다.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당최 손에 잡힐 듯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말했다. 반대로 불의는 우리가 금방 떠올린다. 정의라는 것은 형이상학의 세계에, 불의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슈클라의 주장은 이렇다. 정의라는 모호한 개념을 쌓기 위해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당장 눈에 보이는 학살이며 야만 같은 현실적인 공포부터 차곡차곡 제거하자고, 모호한 '선'을 빚어가는 것보다 당면한 ‘악’을 제거하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빛나는 '권리'를 방어해야 한다며 구름 위에 올라 추상적 개념의 성을 쌓는 대신, 현실의 시궁창에 발을 담그고 일상의 ‘잔혹함' 부터 제거해가라고 자유주의자들에게 일갈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먹질을 하시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있는 그림인데, 이 예배당은 바로 슈클라가 정의보다는 불의에 천착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밝힌 바 있는 지오토 Giotto di Bondone의 <불의 Injustice>라는 그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너 좀 이리 와봐" 의 화끈한 왼손과 “한 대만 맞자"의 나이스한 오른손을 선보이시고, 붙들린 자는 당황하며 "아 저 그게요."의 표정을 짓고 있다. 혼나는 자들은 "이 동물을 바쳐야 기도를 들어 주신다” 따위의 종교 마케팅으로 예배당을 어지럽히던 자들, 즉 가난하고 신실한 자들에게 덤터기를 씌워 이득을 취하던 부패한 장사꾼들이다. 이 나쁜 놈들을 예수님께서 원편치로 시원하게 몰아내는 장면이다.

 

하느님의 집인 예배당을 정의로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고 모호한 선善이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상을 설파하시는 예수님보다는, 이렇게 눈앞의 잘못에 호쾌하게 주먹을 날려 썩은 곳을 도려내주시는 예수님이 나는 더 좋다.

 

이진민 /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중에서

 

 

도슨트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관람객을 인솔하며 재미있게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docent)를 볼 수 있습니다. 도슨트는 '가르치다' 라는 뜻의 라틴어 '도체레(docere)'에서 유래한 말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에게 전시회의 기획 의도와 작품의 의미, 작가와 사회적 배경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해설가입니다.

 

간혹 도슨트를 큐레이터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큐레이터는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을 수집,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를 도슨트가 관람객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