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그럼에도, 사랑의 색을 칠하다

송담(松潭) 2021. 9. 13. 12:25

그럼에도,

사랑의 색을 칠하다

 

마르크 샤갈

(1887-1985)

 

샤갈과 그의 아내 벨라(1923)

 

 

사랑의 순간

 

마르크 샤갈 그림엔 사랑에 빠진 연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쁜 마음을 주제하지 못하고 붕 떠오른다. 샤갈 그림이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마법 같은 ‘사랑의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갈의 별명도 ‘사랑의 화가’다. 낭만적인 그림을 많이 남긴 샤갈의 삶은 작품과 달리 풍파로 가득했다. 소나기가 샤갈만을 따라다니는 듯했다. 불행을 달고 살았던 샤갈은 어떻게 사랑의 화가가 됐을까.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이 남긴 이 말은 샤갈의 삶을 묘사하는 정확한 문장이다. 샤갈의 인생은 비극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멀리서 바라보고 슬픔 속에서도 기어코 사랑의 색을 찾아냈다.

 

 

러시아 유대인 마르크 샤갈

 

태어난 순간부터 샤갈에겐 굴곡진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샤갈은 러시아 태생이다. 가난한 집에서 9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게다가 유대인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도 유대인은 2등 시민이었다. 대도시 한복판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샤갈이 태어난 비테프스크(현 벨라루스)는 유대인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였다. 샤갈이 기억하는 유년은 어둡지만은 않다. 샤갈은 소박한 유대교 예배당과 시골 마을의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화가라는 꿈을 키워나갔다.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준 유대인 공동체 사회의 온기를 평생 간직했다.

 

1906년 샤갈은 제대로 그림을 배우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당시 러시아 수도였던 그곳은 예술가 지망생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발레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본격적으로 배우려면 예술학교가 밀집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력을 쌓아야 했다. 이 모든 기회는 유대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유대인은 예술학교는커녕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것조차 제한됐다. 샤갈은 가짜 통행증을 구해 겨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리 잡았다. 여러 행운이 겹쳤다. 후원자를 만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넓은 세상을 보려 프랑스에 간다. 파리에 도착한 샤갈은 도록에서만 봤던 마네, 모네, 고흐 그림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는 어지러울 만큼 황홀감에 휩싸였다. 곧바로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파리를 두 번째 고향으로 삼고 이름마저 바꿨다. ‘마르크 샤갈’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은 이때 탄생했다. 원래 이름은 모이세 하츠켈레프 세갈이다.

 

 

언제나 마음속엔 고향이

 

오늘날 샤갈은 피카소와 함께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화가다. 경매 시장에서도 샤갈은 인기가 많다. 하지만 비평가에겐 비교적 과소평가받기도 한다. 인상파 모네, 야수파 마티스, 입체파 피카소, 초현실주의 호안 미로 등 미술 거장은 고유한 영역을 개척하며 전설이 됐다. 사갈에게는 이렇다 할 타이틀이 없다. 샤갈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파리 예술계 권력은 피카소였다. 샤갈도 입체파에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특정한 화파에 속하기를 거부했다. 인상파 화가 선배의 철학을 체화했고, 야수파에서는 과감한 색 사용을 배웠다. 가장 중요한 건 시인으로부터 가져왔다. 샤갈은 화가보다는 시인과 더 잘 어울렸다. 파리의 시인들로부터 샤갈은 내면의 정서를 예술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초기작 〈나와 마을> (1911)은 샤갈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좋은 그림이다. 이 작품 안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파리에서 받은 영향을 모두 담았다. 암소와 남자 농부가 마주 보고 있다. 화면 구성은 입체파에서 영향을 받은 듯 기하학적 구도로 나뉘어 있다. 야수파처럼 과감한 색채도 사용했다. 그는 파리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고향을 그리워했다. <나와 마을>은 향수병에 빠진 마음을 달래려 그린 작품이다. 암소와 농부 얼굴 사이엔 고향 풍경이 펼쳐져 있다. 저 멀리엔 유대교 예배당이 보이고, 산양 젖을 짜는 여인과 낫을 든 농부도 그려 넣었다. 따스한 동화 같은 이 그림 덕에 샤갈은 색을 잘 쓰는 화가로 소문났다.

 

 < 나와 마을 >

 

벨라와 함께 날아올랐다.

 

대표작 <생일>(1915)에 깃든 감정은 해석의 여지가 없다. 오직 사랑만이 가득하다. 샤갈은 프랑스로 오기 전 러시아에서 벨라 로젠펠트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둘은 미래를 약속한다. 러시아에 벨라를 두고 유학 온 샤갈은 한 번도 연인을 잊지 않았다. 1914년 샤갈은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간다. 당시 샤갈은 주목받기 시작한 화가였지만, 가난한 집안의 예술가는 그때도 인기가 없었다. 부유한 보석상이었던 벨라의 부모는 결혼을 반대했지만 불붙은 연인을 끝내 갈라놓진 못했다. 샤갈은 1915년 7월 25일 벨라와 결혼한다. 결혼 직전인 7월 7일은 샤갈의 생일이었다. 그날 벨라가 꽃다발을 들고 샤갈을 찾아왔다. 샤갈은 약혼자를 보자마자 표현하기 어려운 황홀함에 휩싸였다. <생일>은 이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작품 속에서 샤갈과 벨라는 입을 맞춘다. 샤갈은 설레고 들뜬 나머지 두둥실 날아올랐다.

 

<생일>

 

 

부부는 프랑스로 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때문에 국경이 봉쇄됐다. 그럭저럭 잘 풀렸던 샤갈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뒤숭숭했지만, 신혼이었던 샤갈은 벨라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축복이었다. 이 기간에 그려진 <도시 위에서>(1914~1918)는 <생일>과 마찬가지로 샤갈의 들뜬 마음이 전해진다. 그림 속에서 샤갈은 벨라를 꼭 껴안고 비테프스크 하늘을 날고 있다. 연인은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발밑 세상에서 벗어나 둘만의 유토피아로 향하는 중이다.

 

<도시 위에서>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 최초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샤갈은 이 거대한 흐름을 반겼고 발을 담갔다. 혁명 세력은 소수민족 차별정책부터 없앴다. 유대인 샤갈은 비테프스크 미술학교 교장 자리에 오른다. 그는 희망에 부풀어 고향을 파리처럼 예술 도시로 만들려 했다. 상황은 조금씩 이상한 방식으로 흘렀다. 혁명으로 권력을 쥔 세력은 예술가를 옥좼다. 그들은 샤갈에게 물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당신의 그림은 레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왜 공산주의를 위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가.” 샤갈 머리 위에 드리운 먹구름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샤갈은 궁지에 몰렸다. 반혁명적 예술가로 낙인찍혔다. 목숨마저 위태로웠다. 1922년 샤갈은 벨라와 함께 러시아를 탈출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외출이었다. 난민처럼 떠돌다 파리에 정착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샤갈에겐 벨라와 딸이 있었다. 계속 그림을 그렸고, 이름값은 높아졌다. 행복은 짧았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됐다.

 

 

사랑의 기억

 

유대인 숙청에 앞장섰던 히틀러는 사갈을 콕 찍어 제거해야 할 예술가로 취급했다. 나치는 1937년 <퇴폐미술전〉을 열어 샤갈 그림을 전시했다. 그러면서 ‘삐뚤어진 유대인 영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조롱했다. 1년 후 샤갈은 유대인 학살을 비판하는 <하얀 십자가상>(1938)을 그리며 히틀러에 대항했다. 나치 영향력은 나날이 커졌다. 샤갈은 겨우 미국으로 탈출했다. 당시 미국엔 샤갈처럼 나치를 피해 피란 온 유럽 예술가가 많았다. 미국은 단숨에 현대미술 중심지가 됐다. 예술가들은 기회의 땅 미국에서 다시 무언가를 창조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샤갈은 그러지 못했다. 미국에 온 지 3년 만에 벨라가 급성감염으로 눈을 감았다. 벨라와 함께한 30년 동안 샤갈에겐 오직 벨라뿐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낀 그는 1년 가까이 붓을 들지 못했다.

 

벨라가 떠난 후 샤갈의 그림은 어두워졌다. 농밀한 사랑의 색으로 가득했던 그림은 어두운 절망의 색으로 물들었다. 암흑 속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사랑은 떠났지만, 사랑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샤갈은 조금씩 회복했다. 벨라와 함께했던 날을 떠올리며 다시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도는 그림을 그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샤갈은 프랑스로 돌아간다. 반평생을 난민처럼 떠돌아다닌 샤갈은 결국 보상을 받았다. 그를 따라다니던 소나기는 그제야 멈췄다. 남은 삶은 비교적 평탄하게 흘렀다. 거장으로 칭송받았으며, 자신의 그림이 루브르에 걸리는 영광도 지켜봤다. 1973년에는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러시아 땅도 다시 밟았다. 고국을 등진 지 50년 만이었다. 1985년에 그린 <또 다른 빛을 향하여>의 주인공은 화가다. 그림을 그리는 중인 화가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 화가 앞엔 캔버스가 놓여 있다. 거기엔 포옹 중인 남녀가 있다. 여자는 꽃을 들고 있다. 70여 년 전 샤갈 자신에게 꽃다발을 들고 왔던 벨라처럼, 샤갈은 이 그림을 완성한 직후 98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그렸다.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

 

샤갈은 20세기에 일어난 굵직한 비극을 정면으로 맞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차별당하는 존재였고,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향에서도 내쳐졌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면 납득이라도 할 텐데, 샤갈이 겪은 불운은 그저 불운이었다. 삶의 길목 곳곳에서 절망과 허무함이 샤갈의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벨라와 함께 날았던 샤갈은 끝내 추락하지 않았다. 사랑의 부력은 절망의 장력보다 힘이 셌다. 샤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진정한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

 

음악, 문학, 그림, 춤, 영화의 주요 관심사는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래서 사랑을 말하는 예술을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장 진부한 것이 가장 중요할 때도 있다. 삶이 불행으로 가득하고 또 언젠간 끝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부한 사랑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소나기가 내릴 것 같은 날 우산을 챙겨주는 연인, 끼니를 제때 먹었는지 걱정해주는 가족, 이런 소소한 사랑 덕분에 인간은 비극에 파묻히지 않고 희극을 개척해나간다. ‘사랑의 화가’ 샤갈이 그랬던 것처럼.

 

 

< 2 >

 

잊혀지지 않을 슬픈 전설

 

천경자(1924~2015)

 

 

뱀을 그리는 여자

 

1952년 부산은 거대한 피란촌이었다. 죽음을 피해 떠나온 실향민으로 북적였다. 거기엔 당연히 예술가들도 있었다. 6.25 전쟁은 그들의 창작욕을 꺾지 못했다. 부산이 피란 수도 역할을 맡은 3년간 이곳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는 100건이 넘는다. 젊은 화가들은 다방, 폐건물, 길거리에 그림을 내걸었다. 그 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작품은 <생태>(1951)다. 생태는 독사 35 마리가 한데 뒤엉켜 있는 그림이다. 공포와 금기의 상징인 뱀이 우르르 등장하는 이 작품은 금세 유명해졌다. 도발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여자라는 사실도 당시엔 파격이었다. ‘뱀을 그리는 여자가 나타났다'라는 소문이 부산 전체에 퍼졌다. 전시회는 <생태>를 보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천경자라는 이름이 한국 미술사에 각인된 순간이다.

 

천경자는 훗날 <생태>를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뱀을 참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 동생의 죽음, 불안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징그러워 몸서리치며 뱀 집 앞에서 스케치했고, 그러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태>를 그렸을 때 천경자는 27세였다. 당시 천경자는 불행이라는 폭우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집안이 몰락했고,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다. 세상은 자신의 그림을 무시했다. 폐병을 앓던 여동생마저 세상을 떠났다. 슬픔에 잠긴 천경자는 어느 날 우연히 말을 있다. 마법처럼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독을 품고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뱀을 보자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했다. 구렁이 같은 삶에 저항해야겠다는 의지도 일었다. 뱀은 천경자에게 위로, 구원, 부적인 셈이었다. 천경자는 뱀을 스케치했고 그 결과 <생태>가 탄생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태어난 천경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웠다. 당시 제대로 미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천경자는 가장 권위 있는 미술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2년 연속 입선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지만 광복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일제 잔재 청산이 시대정신이 됐다. 한국 화단은 일본 채색화 기법을 터독한 천경자를 깎아내렸다. 일본에서 채색화를 배운 한국화가 대부분은 수묵화로 전향하며 시류에 합류했다. 천경자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다. 그는 그림을 정치적 이해와 엮지 않았다. 예술은 예술일 뿐이었다. 결국 <생태>로 화단을 뒤흔들며 모든 비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생태>에 반한 인물 중엔 김환기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도 거장 대우를 받는 화가였다. 천경자는 김환기의 추천으로 홍익대 미대 교수 자리를 얻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세밀한 묘사로 사실적인 작품을 그렸던 천경자의 붓은 1950년대 중반부터 현실에서 해방돼 저 너머의 세계로 향했다. 천경자는 꿈, 환상, 낭만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는 샤갈 작품처럼 ‘사랑’이라는 정서로 가득하다. 당시 천경자는 가족을 돌보지 않는 허랑방탕한 두 번째 남편 때문에 마음 평온한 날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사랑은 고독이고 고통이었다. 아등바등 네 자녀를 혼자서 키웠다. 천경자는 35마리 뱀을 그렸을 때처럼 자신이 색칠한 ‘사랑의 세계’에서 위안을 얻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1960년대 후반부터 천경자는 본격적으로 여인상을 그렸다. 대표작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다. 오십 대에 들어선 천경자가 22세 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그린 자화상이다. 뱀 네 마리를 월계관처럼 머리에 두른 젊은 여성이 정면을 응시한다. 가슴에 장미꽃 한 송이가 달려 있다. 이렇다 할 표정 없는 얼굴은 스산하다.

 

천경자의 여인상은 화가 본인의 고통을 주제로 삼은 점에서 프리다 칼로 자화상과 비교된다. 다만 두 화가 작품에 깃든 온도는 다르다. 망가진 육체와 마음을 짊어졌던 프리다는 고통을 직시했다. 그림 속에서 프리다는 쏘아보듯 우리를 응시한다. 강인한 눈동자엔 저주 같은 운명을 향한 분노가 담겨 있다. 반면, 천경자가 그린 여성의 눈동자는 담담하다. 허공을 바라보는 듯하다.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은 무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인 후 초월적 경지에 가닿은 모습이다. 천경자는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천경자는 고갱처럼 열정적인 여행자였다. 1969년 남태평양을 시작해 아프리카, 인도, 중남미, 유럽, 미국 등을 여행했다. 전 세계 풍경을 두 눈에 담았고, 그곳 여성을 그렸다. 천경자가 그린 태국 여성, 자메이카 여성, 인도 여성, 하와이 여성, 괌 여성, 스페인 여성의 피부색은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눈동자는 모두 황금색이다. 얼굴 생김새도 자화상 속 여성과 빼닮았다. 천경자가 그린 전 세계 여성은 결국 자화상의 변주다. 그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본 것은 슬픔과 고독을 끌어안고도 초연히 살아가는 여자들이었다. 천경자는 그들의 얼굴에서도 ‘슬픈 전설’을 봤다.

 

 

30년간 이어진 <미인도> 스캔들

 

 

천경자는 오직 그림에만 몰두한 외골수는 아니었다. 박경리 등 걸출한 문화예술계 인사와 두루 어울렸다. 글솜씨도 유명했다. 그는 10여 권의 수필집을 출간한 문인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 김환기, 박수근을 잇는 거장 화가의 지위를 얻었다. 한 많은 삶을 버텼던 여인에게 세상이 이제야 보상하는 듯했다. 이 모든 것은 1991년 한 번에 무너졌다.

 

〈미인도〉 스캔들이 터졌다. 〈미인도〉는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의 자택에서 나온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91년 〈미인도〉를 세상에 공개했다. 천경자는 “내가 그린 작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미술관 측은 “진품이다”라며 반박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각을 세운다는 건 주류 미술계를 적으로 만든다는 의미였다. 천경자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자식처럼 아낀 화가다. 천경자는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미인도〉가 위작임을 주장했다. 미술계는 천경자를 두고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 라고 공격했다. 천경자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마음을 다쳤다. 결국 절필을 선언했다. 1998년 첫째 딸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소식은 묘연했다. 시간이 흘렀다. 2015년 천경자가 미국에서 91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는 부고가 전해졌다.

 

추모 분위기는 잠시뿐이었다. 세상은 다시 〈미인도〉 위작 논란에 집중했다. 유족은 진품 여부를 따지기 위해 프랑스 감정업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를 섭외했다. 이 업체는 루브르 박물관과 협업할 정도로 권위를 갖춘 곳이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은 0.0002%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위작이라고 봤다. 그럼에도 검찰은 “〈미인도> 진품이다”라며 결론을 뒤집었다.

 

〈미인도〉를 둘러싼 공방이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사이 김환기, 박수근 작품은 전 세계 무대로 진출했고 전설이 됐다. 〈미인도〉에 발목 잡힌 천경자는 그들만큼 높은 곳으로 날지 못했다. 그가 50년간 쌓아온 성취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아직도 세상은 천경자라는 화가를 이야기할 때 “〈미인도〉는 진품인가, 가짜인가”에 가장 큰 관심을 둔다.

 

 

초연했던 눈동자는 결국 슬픔으로

 

천경자에게도 재능과 열정이 있었지만 세상은 그의 앞길을 막았다. 발목을 잡고, 할퀴고, 상처를 줬다. 〈미인도〉 스캔들 직후 천경자는 붓을 내려놨지만, 곧 “절필은 내게 죽음이다” 라며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 기간 탄생한 천경자 작품엔 짙은 어둠이 배어 있다. 거기엔 절제된 슬픔이 아닌 선명한 슬픔이 있다. 1995년 작 〈환상 여행>은 절절한 고통이 검은 강물처럼 흐르는 작품이다. 저승으로 보이는 암울한 공간에 여인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들은 고독해 보인다. 눈동자엔 절망, 원망이 서려 있다. 자신의 ‘슬픈 전설’을 초연한 눈동자로 지켜봤던 화가는 끝내 꾹꾹 눌러왔던 아픔을 터뜨렸다.

 

1998년 천경자는 서울시립미술관에 그림 93점을 기증했다. 작품을 건네며 먼 곳으로 자식을 영영 보내는 부모처럼 속상해 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고, 17년 뒤 한 줌의 재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다. 유족은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아 고인의 작품 곁을 걸었다.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은 천경자가 기증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을 제외하면 언제든 입장료 없이 천경자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사연 많은 인생, 숙명 같았던 고독, 쓸쓸한 영혼, 하지만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은 강한의지. 이 모든 것을 끌어모아 화폭에 담은 화가. 이제라도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슬픈 전설’을 마주해야 한다.

 

 

 

< 3 >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에드워드 호퍼(1882~1967, 미국)

 

 

도시의 밤은 쓸쓸하고, 공허하고, 무섭다. 늦은 밤에 24시간 김밥집에 홀로 앉은 사람들은 왜 이제야 끼니를 때우는 걸까. 업종을 알기 어려운 저 간판 뒤엔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낮에 걸었던 이 길은 도대체 왜 낯선가. 깊은 밤 깜깜한 대도시의 골목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가로등 불빛도 닿지 않는 거리를 걷다 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된다. 누군가 따라오는 듯해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 저 끝에 반짝이는 편의점이 눈에 들어오면 왠지 안심이 된다. 편의점엔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 사실만으로도 왠지 위안이 된다. 편의점은 도시의 등대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

 

 

만약 에드워드 호퍼가 오늘날 한국을 찾았더라면 늦은 밤 골목길에서 홀로 빛나는 편의점을 그리지 않았을까.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은 여러모로 도시의 편의점과 닮았다. 이 그림에는 도시의 밤이 간직한 사연들이 깃들어 있다. 정면에 한 싸구려 식당이 보인다. 식당은 행인 한 명 없는 적막한 길모퉁이에서 홀로 불빛을 내뿜는다. 그 안엔 잘 차려 입은 남자가 혼자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의 등에는 검은 그림자가 가득히 배어있다. 맞은편에는 남녀가 나란히 앉아있다. 그들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다. 언뜻 연인으로 보이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오늘 밤 처음 만난 사이일지도 모른다. 밤에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법이다. 야심한 시간에 한 푼 더 벌어보려는 식당 주인은 손님에게 기계적으로 말을 건다. 그의 퇴근은 아직도 멀었다. 이 그림은 주로 현대인의 외로움이란 주제로 해석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결은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고독, 우울, 쓸쓸함을 읽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불안과 공포를 읽을지도 모른다. 호퍼의 그림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호피는 식당, 호텔, 주유소, 카페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 인물은 공허해 보인다. 그들이 어떤 사연을 지녔을지 상상하게 된다. 2017 년 국내에 『빛 혹은 그림자』라는 책이 출간됐다. 17명의 작가가 호퍼 그림에서 느낀 인상만으로 쓴 단편소설을 엮은 책이다. 스티븐 킹, 조이스 캐롤 오츠 등 대가들이 호퍼의 그림에 매료돼 상상을 펼쳤다.

 

 

 

 

< 4 >

 

서울에 불시착한 우주선

 

자하 하디드(건축가, 1950~2016)

 

 

 

곡선의 여왕

 

우주선이 서울 한복판에 착륙한다는 기이한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 시민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우주선을 향해 ‘흉물’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많은 사람이 우주선이 서울에 오면 안 된다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언론까지 가세해서 이 우주선을 비난했다. 낯선 것을 경계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예정대로 우주선은 2014년 서울에 착륙했다. 많은 사람들은 “저건 괴물이야”라고 기겁하며 손사래 쳤다. 우주선의 이름은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다. DDP는 조감도가 공개된 순간부터 심한 수모를 겪었다. 한국 건축계는 DDP에 집중포화를 쏟아냈다. 비판의 근거는 다양했다. 알루미늄 패널 4만여 장으로 뒤덮인 DDP 외관은 '우주선'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낯설었다. 서울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설 건물치고는 전위적이었다. 천문학적인 비용도 지적당했다. 공사비는 5000억 원에 달했다. DDP는 세금이 투입되는 공공건축물이었기에 '혈세 낭비' 논란을 피하기 어려웠다.

 

DDP라는 우주선이 서울에 안착한 후 몇 년이 흘렀다. DDP를 둘러싼 우려는 무색해졌다. DDP는 연간 100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됐다. ‘서울 랜드마크’라는 위상도 얻었다. 샤넬, 루이비통, 디올 등 전 세계 패션 브랜드가 앞다퉈 DDP를 전시 장소로 정했다. 봄과 가을에 DDP에서 열리는 서울패션위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강력한 문화콘텐츠가 됐다. DDP를 겨냥했던 매서운 말의 기세는 거품처럼 빠르게 꺼져버렸다. DDP를 설계한 건축가는 곡선의 여왕으로 불리는 자하 하디드다. 그의 인생은 DDP를 닮았다. 하디드는 세상에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부당한 방식으로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버텼고, DDP처럼 끝내 우뚝 섰다.

 

 

"삶은 격자무늬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아요”

 

DDP에는 직선이 없다. 곡선으로만 이뤄진 DDP는 흐르는 물처럼 역동적이다. 거대한 미지의 생물 같기도 하다. 하디드가 태어난 곳의 풍경도 그랬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인 하디드는 어린시절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을 보며 자랐다. 허허로운 풍경 속에서도 소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느꼈다. 하디드는 바람만 불어도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바뀌는 모래언덕에 마음을 뺏겼다. 유년에 하디드가 마주했던 변화무쌍한 자연의 얼굴은 그의 건축 모티브가 된다. 하디드는 훗날 “당신의 건축엔 왜 직선이 없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삶은 격자무늬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아요. 자연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어느 곳 하나 평평하거나 균일한가요? ” 하디드가 태어난 이라크는 신비로운 자연을 품은 곳이었지만, 여성에게는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그곳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성에게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가혹한 땅이다. 하디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개방적인 하디드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부녀는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하디드는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양식에 호기심을 느꼈다. 사막과 습지대처럼 다양한 자연을 마주하며 심미안을 키웠다. 10세가 조금 넘었을 때부터 하디드는 건축가라는 꿈을 갖는다. 그는 잠시 레바논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1972년 영국 건축 명문 AA 스쿨에 들어간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DDP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자체로 거대한 정원 모양이다. 하디드는 역사적으로 한국인이 정원을 각별히 여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DDP는 정원과 산책로를 품고 태어났다. 덕

분에 특별한 목적 없이 한가로이 걷고, 쉬기 위해 이곳을 찾는 시민도 많다. 하디드는 한옥의 매력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했다. DDP는 정문, 후문 개념이 없는 뚫린 공간이다. 이런 개방성은 한국 전통가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디드는 동대문에 깃든 역사에도 주목했다. 그는 조선시대가 남긴 유산보다는 지금이 순간의 역사에 집중했다. 하디드는 동대문 일대에 둥지를 튼 패션타운을 눈 여겨 봤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꿈틀거리는 그곳의 역동적인 기운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DDP가 탄생했다. DDP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건 곡선과 더불어 4만여 장의 알루미늄패널이다. 이 많은 패널은 제각각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사람의 시선, 빛의 세기, 시간대에 따라서 패널은 제각각 방식으로 번득이고 꿈틀댄다.

 

하디드는 제 나름 한국적인 요소를 DDP에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DDP는 한국적이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런 원성은 해외 건축가를 향한 텃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디드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독특하게 해석했기 때문에 거장이 된 건축가다. 하디드는 분명히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고려해 DDP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물은 우리에게 생경했다. 조선시대 역사가 깃든 터였기에 비판의 수사는 날카로웠다. 한국 건축계는 DDP가 세워진 이후에도 한동안 ‘우리의 역사를 지우는 괴물’이다며 애통해했다.

 

1889년에 프랑스 파리에 세워진 에펠탑도 시작은 DDP와 비슷했다. 19세기 말 파리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나는 매일 에펠탑 안에 있는 카페에 간다. 파리에서 에펠탑이라는 흉물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에펠탑은 DDP이상으로 미움받았다. 파리 어디에서도 보이는 이 건축물이 너무 싫어서 도시를 떠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젠 파리를 생각하면 누구나 에펠탑부터 떠올린다. 프랑스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던 에펠탑은 프랑스 그 자체가 됐다. 건축은 시간이라는 옷을 겹겹이 입으며 완성되기도 한다.

 

DDP는 에펠탑보다 더 빠르게 오해를 풀었다. 지금은 괴물이란 오명을 벗어 던지고 오아시스처럼 이 도시에 활력을 공급 중이다. 하디드가 공모전 단계에서 DDP에 붙인 이름은 '환유의 풍경'이다. 산, 물결, 바람, 미래, 우주, 도시. DDP가 환유하는 대상은 많다. 우리는 DDP를 보면서 제각각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정답이다. 하디드는 “건축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사람들이 생각 못 했던 풍경을 선사하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DDP는 거대한 언덕이기도 하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걷고, 오르다 보면 축구장 크기 옥상 정원이 나온다. 그곳에서 DDP를 에워싼 서울을 둘러볼 수 있다. 하디드의 곡선 위로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며 누군가는 이전까지 몰랐던 서울의 얼굴을 마주할 수도 있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꿈을 꿀지도 모른다. 어린 하디드가 사막 풍경을 보며 그러했듯이.

 

 

 

< 5 >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

 

피나 바우슈(현대무용가 · 안무가, 1940~2009)

 

 

엄마의 춤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가 개봉하고 한 달 후 독일 무용가이자 안무가였던 피나 바우슈가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가 <마더>를 봤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김혜자의 춤 장면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마더)가 지닌 여러 장점 중 김혜자 연기는 다른 모든 장점을 압도한다. 그가 보여준 모성은 검은 우물처럼 헤아리기 어렵다. 텅 빈 눈동자로 제 새끼를 지켜내는 김혜자는 짐승의 어미 같은 기운을 풍긴다. <마더>는 몸짓으로 시작해 몸짓으로 끝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면 김혜자는 억새밭에서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춤을 춘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또다.시 춤을 춘다.

 

독무로 시작한 영화는 군무로 마침표를 찍는다. 아들을 구하려 살인까지 저지른 엄마. 그는 넋이 나간 상태로 관광버스에 오른다. 그 안에는 춤을 추는 중년 여성들(엄마들)로 가득하다. 김혜자도 무리에 합류해 춤을 춘다. 카메라는 점점 바깥으로 빠지며 멀리서 버스 안 춤사위를 실루엣으로 보여준다. '엄마'라는 관념이 덩어리째 모여 벌이는 굿판처럼 느껴진다. 저 춤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지만 김혜자의 흐느적거리는 몸짓은 관객 마음 깊숙한 곳까지 휘젓는다. 백 마디 말보다 힘이 센 동작은 마법에 가깝다. 피나 바우슈가 창조한 몸짓이 그랬다.

 

 

셰익스피어를 모욕하다니

 

무용계에서 피나 바우슈는 혁명가로 통한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8년 독일에서 셰익스피어 학회 연례행사가 열렸다. 피나 바우슈의 무용 공연 <맥베스>가 올랐다.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무용수들이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객석에 앉은 점잖은 교수들의 얼굴이 상기됐다. “셰익스피어를 모욕하다니.” 그들은 야유를 쏟아냈다.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피나 바우슈는 1년 뒤 인도에서도 사고를 쳤다. 여성 무용수들이 맨살을 훤히 드러내고 무대에 올랐다. 힌두교도들은 공연을 중단시켰고, 격렬히 항의했다. 무용수들은 탈출하듯 공연장에서 빠져나왔다.

 

배경지식 없이 피나의 공연을 접한 관객은 이런 질문을 던질수 있다. '이것도 춤이란 말인가.’ 고전발레는 몸의 곡선, 우아한 도약을 내세우며 인간의 몸을 상찬했다. 피나의 관심사는 달랐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피나의 무대에 오른 무용수의 몸짓은 춤보다는 몸부림에 가깝다. 짐승처럼 격렬히 날뛰고, 유령처럼 정처 없이 무대를 헤맨다. 육체에 공포, 고독, 외로움, 환희, 비탄 등 온갖 감정이 서려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피나가 남긴 이 말은 그의 작품 세계를 압축한다. 그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을 탐구했다. 저 남자는 왜 고독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저 여자의 어깨는 왜 축 늘어져 있는가. 저 노인은 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을까.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맥락 그 자체를 무대에 올렸다.

 

피나는 '탄츠테아터' 장르를 개척했다. 독일어로 '탄츠'는 춤, '테아터'는 연극이다. 그의 무용수들은 춤을 추다 멈추고 연극배우처럼 대사를 내뱉고, 시를 읊조린다. 목 놓아 울고,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고전발레 형식을 무너뜨렸다. 젊은 백인 무용수가 대부분이었던 발레의 성역도 허물었다. 그의 무용단엔 이제 막 성인이 된 무용수부터 환갑을 바라보는 단원도 있었다. 그들은 국적, 피부색도 제각각이었다.

 

 

공허한 사람들 <카페 뮐러>

 

대표작 <카페 뮐러>(1978년 초연)무대는 어두컴컴한 카페다. 목제 의자 수십 개가 아무렇게 흩어져 있다. 카페 안으로 여자가 들어온다. 하얀 잠옷을 입은 여자는 두 눈을 감고 몽유병 환자처럼 카페 안을 떠돈다. 이어서 남자 웨이터가 등장한다. 그는 무아지경으로 움직이는 여자를 따라다닌다. 여자가 의자에 부딪히지 않도록 웨이터는 필사적으로 장애물을 치우며 길을 만든다. 여자에게 웨이터는 투명 인간이다. 자신에게 헌신하는 남자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웨이터는 자신 따윈 안중에 없는 여자를 위해 안간힘 쓴다.

 

잠시 후 흰 셔츠를 입은 남자 A가 등장한다. 유령처럼 떠돌던 여성은 천신만고 끝에 재회한 연인을 대하듯 A를 와락 껴안고 얼굴을 맞댄다. 무대에 또 다른 남자 B가 등장한다. 검은 정장 차림의 B는 저승사자 같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찰싹 붙어 있는 연인에게 다가간다. B는 피조물을 조작하듯 연인의 포옹을 기계적으로 풀어 헤치며 둘을 떨어뜨린다. 곧장 연인은 다시 포옹한다. B는 또다시 연인의 포옹을 풀어 헤친다. 연인은 다시 껴안고 B는 또 그들을 떼어놓는다. 도돌이표 안에 갇힌 인간처럼 연인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몸의 언어만 등장하는 〈카페 뮐러>서사가 없는 이 작품을 논리적으로 뜯어보고 해석하려 하면 금세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이 작품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북받쳐 눈물을 흘린다. 추상적인 이 작품은 구체적인 감정을 하나둘 깨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웨이터. 헤어지고 헤어지는 연인. 폐허 같은 공간, 공허한 사람들. 누군가에겐 카페 뮐러 무용수 몸짓 하나하나가 기억, 상처, 시, 위로다.

 

<카페 뮐러>는 피나의 유년 시절 기억이 녹아든 작품이다. 그는 1940년 독일 소도시 졸링겐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작은 여관을 운영했다. 피나는 여관에 딸린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소녀는 이런 풍경을 봤을 것이다.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막연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자, 이별을 앞둔 연인의 초조한 눈빛,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주변을 살피는 남자. 패전국가의 음울한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어른들, 피나는 훗날 이 불안한 영혼들을 무대로 소환했다.

 

 

춤이 아니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

 

독일 거장 감독 빔 벤더스는 피나 바우슈와 오랜 친구다. 그는 친구의 무용 세계를 함축할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촬영 직전 문제가 생겼다. 암 진단 5일 만에 피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다큐는 무산 위기에 놓였다. 빔 벤더스와 부퍼탈 탄츠테아터(피나 바우슈가 이끌었던 무용단) 단원들은 고심 끝에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피나>(2011)가 완성됐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도 예술적인 도전이었다. 3D 효과를 도입해 무용수의 땀방울, 근육 떨림까지 생생하게 잡아냈다.

 

다큐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은 피나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피나는 언제나 질문을 던졌어요.” 피나는 단원에게 지시하거나 조언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졌다.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고독은 무엇일까요?” 단원들은 제각각 방식으로 대답했다. 누군가는 말로 생각을 표현하고, 누군가는 춤으로, 노래로, 연기로 답했다. 그는 무용수 개인의 상상, 느낌, 상처를 무대에 올렸다. 그래서 부퍼탈 탄츠테아터가 보여준 모든 춤에 감응하기는 어렵다. 어떤 춤은 곧장 마음에 들러붙지만, 어떤 몸짓은 해석 불가능한 암호처럼 막막하다. 관객이 보는 것은 누군가의 심연이다. 타인의 심연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할 방법은 없다.

 

피나는 이렇게 말했다. “춤이 아니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 그에겐 춤이 언어였다. 이 언어로 타인의 절망과 슬픔, 고독과 외로움, 공허와 두려움을 헤아려보려 했다. <마더>에서 김혜자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춤을 췄다. 죄를 씻기 위한 제 나름의 제의였을까. 극단적인 상황에 부닥친 인간이 내뿜은 광기였을까. 우린 그가 왜 춤을 췄는지 끝내 알 수 없다. 어쩌면 춤을 추는 본인조차 모를 것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나는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모두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고개를 돌릴 순 없다. 피나 바우슈처럼 계속 들여다보고, 탐구하고, 헤아

려보고, 공감해야 한다.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조성준 / ‘예술가의 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