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이 미술의 존재양식을 변화시키다
흑사병은 1347년 겨울 시칠리아에 상륙한 후 곧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348년 봄부터 피사, 피렌체, 시에나 같은 중부 내륙의 도시들을 차례대로 괴멸시켰고 곧이어 유럽 구석구석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죠. 2년 반 만에 유럽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천5백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유럽을 송두리째 파괴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흑사병은 눈만 마주쳐도 옮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전염력이 높았을 뿐 아니라 치사율도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하던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사망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웠다고 해요. 병의 증상은 여러 기록에서 일관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환자는 짧으면 사나흘, 길면 일주일 안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흑사병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발병한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스러웠습니다. 대역병은 1362년에 또다시 발발했는데 이때 사람들은 1차 때보다 더 큰 충격에 빠진 것으로 보여요. 엄청난 재앙이 끊이지 않고 되풀이된다고 느끼자 사람들은 완전히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은 1373년, 1375년, 1383년, 1390년, 1399년에도 계속 발병하는데, 우리가 말하는 르네상스는 흑사병의 병마가 가장 맹위를 떨치던 대역병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의 스트로치 예배당 내부.
이 예배당은 1차 흑사병 발생 직후에 조성되어
흑사병의 충격이 미술에 끼친 영향을 잘 보여주는 예로 알려져 있다.
결국 르네상스란 흑사병이라는 가공할 공포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낸 도전의 역사였던 거죠.
흑사병은 서양미술의 흐름을 크게 뒤바꿔놓은,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흑사병은 미술의 양식이나 도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무엇보다도 미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자체를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흑사병이 미술에 끼친 영향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특히 이 성당 안에 자리하고 있는 스트로치 가문의 예배당은 당시 미술의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참고로 당시 성당 안에는 이처럼 작은 예배당이 곳곳에 들어섰는데, 성당에 딸린 일종의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집안이 이를 얻으려면 '분양'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중앙 제단 옆에 위치한 예배당이었고,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쯤은 되어야 그같이 좋은 자리를 살 수 있었죠.
앞 페이지의 사진은 스트로치 예배당의 전면을 보여줍니다. 벽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고 한가운데에 제대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당은 집안의 무덤으로 쓰였기 때문에 아주 정성 들여 꾸몄습니다. 스트로치 예배당은 1차 흑사병 발생 직후인 1350~57년 사이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흑사병의 충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수 있어요.
제대화란 제단화라고도 부르는데, 미사를 거행하는 제대 위에 올려놓는 그림입니다.
성당 건축을 후원하는 것보다 성당 내부의 그림을 후원하는 것이 비용 면에서 효과적이라는 것을 피렌체 사람들은 상인의 도시 출신답게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것이죠. 소위 말해 '가성비'가 좋았기 때문에 흑사병 이후 제대화에 대한 후원이 집중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죽음이 도처에 널린 시대에 사람들은 미술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좀더 명확하게 구체화시키려 했던 것이죠. 그림을 주문하고 그것을 교회에 놓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사회에 항구적으로 남기려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내세관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머무는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일종의 대기실인 연옥에서 속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중세 사람들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지상의 사람들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이들의 기도를 받기 위해 교회의 제대화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이죠. 어떻게 보면 그림 속에서 내세를 위한 구원을 기다린 셈이죠.
양정무 / ‘벌거벗은 미술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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