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렘브란트(1606~1669, 네델란드)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의 말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돌아온 탕자」가 있습니다. 남루한 행색으로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품에 안긴 모습입니다. 아마 렘브란트는 말년에 생을 되돌아보면서 아버지 품에 안긴 탕자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했을 것입니다. 렘브란트뿐만 아니라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탕자에게 자기 자신을 이입합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성직자이자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에서 생각을 일깨우는 해석을 보여줍니다.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직접 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그의 책에 따르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세 명입니다. 탕자뿐만 아니라 맏아들 장자와 아버지도 주인공이라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그림 속 탕자의 삶에 자신을 투영하는데 나우웬의 영적 삶도 처음에는 탕자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집을 나와 헛된 욕망을 채우며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다가 계속된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탕자가 바로 자신의 영적 삶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탕자와 아버지 옆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장자로 시선을 돌리죠. 장자는 줄곧 아버지의 품 안에서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죠. 나우웬은 이런 장자의 모습을 통해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불만과 불신을 떨쳐낼 수 없었던 자신의 태도를 성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함을 말합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걸인의 행색으로 돌아온 아들을 원망하는 내색 없이 따뜻하게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모든 신앙인의 지향점이라고 말하죠.
가톨릭 신부였던 나우웬은 종교적 교리와 율법에 근거하여 렘브란트의 그림을 읽어내면서 자신이 탕자에서 장자가 되었다가, 끝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해석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이렇듯 17세기에는 유쾌함과 방종의 한편에 참회의 모습이 자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극배우처럼 화려한 옷과 모자를 걸치고 자신의 경제적 번영을 자신 있게 드러낸 그림과 그 옷을 모두 내던지고 초라한 행색으로 참회하는 말년을 보여주는 그림의 대비는 르네상스시대와 다른 문명의 깊이를 느끼게 하죠. 특히 박물관에 전시된 돌아온 탕자는 관객의 눈높이가 탕자의 발에 닿게끔 걸려있는데요. 더러운 맨발과 뒤축이 전부 해진 신발을 눈앞에서 마주한 관람객은 그 앞에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뢰트겐 피에타
「뢰트겐 피에타」, 1300년경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를 의미하는 피에타(Pieta)는 기독교 미술에서 빈번히 다뤄진 주제 중 하나입니다.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품에 안고 슬피 울며 애도를 표하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죠. 피에타를 형상화한 조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유명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순백색 대리석으로 절제된 감정표현을 하는 반면, 이보다 200여년 정도 앞서서 독일에서 만들어진 ‘뢰트겐 피에타’는 고통과 슬픔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얼굴이 크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희미해지고 고통만 남은 예수의 얼굴과, 죽어가는 예수를 내려다보는 성모마리아의 절망적이고 애처로운 표정이 아주 잘 보이죠. 당시 사람들은 이같은 조각 앞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받았을 고통에 함께하려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그리고 공공박물관의 탄생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낡은 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시민사회의 등장을 가져왔지만 그 빛나는 성과만큼 혼돈도 컸습니다. 결국 혁명은 절대왕권보다 더 강력한 절대권력을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등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혁명 이념의 수호자라는 명분으로 유럽을 정복해나갑니다. 1796년 나폴레옹의 원정대는 이탈리아 전역을 평정해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미술품 중 600여 점을 선별해 프랑스 파리로 보냅니다. 「벨베데레의 아폴로」도 여기에 포함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나폴레옹 원정대의 전리품 중 가장 빛나는 성과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됩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거둔 나폴레옹의 승리를 담은 강력한 증거이자, 파리가 로마를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중심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앞에 있는 네마리 말의 청동상도 이때 파리로 약탈당했습니다. 사실 이 상은 베네치아가 비잔틴제국으로 부터 약탈한 것이기 때문에 '약탈품의 약탈'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청동말들은 원래 고대 그리스 또는 로마 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오랫동안 비잔틴제국 콘스탄티노플의 경주장을 장식하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 십자군이 약탈해왔죠. 이후 베네치아의 국가적 상징으로 자리잡은 이 조각상을 이젠 나폴레옹 원정대가 프랑스로 가져간 것입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무수한 미술품을 약탈했는데 그 장면이 얼마나 독특했던지 이를 그린 기록화나 풍자화가 여러 점 남아 있을 정도죠.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곳곳에서 약탈한 미술품으로 루브르 궁전을 가득 채웠는데, 그양이 무려 5천점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노략질한 미술품들을 본국으로 돌려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약탈품을 돌려줘야 했지만, 문화재 반환은 오늘날에도 그러하듯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약탈된 작품을 돌려주려 해도 돌려 줄 장소나 기관이 사라진 곳도 있고, 무엇보다 프랑스 정부가 이 일을 미온적으로 처리하면서 적지 않은 수의 약탈 미술품들이 오늘날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베로네세Paolo Veronese가 그린 초대형 그림 「가나에서의 혼인잔치」는 1797년 나폴레옹 군대에 의헤 베네치아 산조르조 성당에서 파리로 옮겨졌고, 여전히 루브르 박물관 대표작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19세기를 '박물관의 시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박물관은 바로 프랑스의 루브르입니다. 루브르는 12세기 후반에 바이킹을 방어하는 요새로 건설되었다가 16세기부터 궁전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1872년 루이 14세가 왕궁을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로 옮기면서 왕궁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집니다. 이후 루브르의 빈 공간에는 여러 왕립 기관들이나 협회 등이 들어서는데 이 과정에서 미술 아카데미와 공예 공방도 자리하게 됩니다. 한편 루브르는 왕실이 수집한 미술품의 수장고 역할을 하면서 이를 전시하는 장소로도 쓰이게 되는데, 향후 들어설 박물관 기능을 예견한 것이죠.
1793년, 즉 프랑스혁명 이후 4년째 되던 해에 이 공간은 국가 소유의 미술품을 정기적으로 공개 전시하는 '공공 미술관'이 되었고, 모든 시민에게 개방되었습니다. 이때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왕실이나 귀족, 교회 등으로부터 국유화한 작품들이었고요. 최초의 공공 미술관이라는 타이틀을 루브르에 부여하는 까닭은 이곳이 바로 프랑스혁명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제의 심장이었던 왕궁을 모든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개방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고, 이곳을 과거의 지배층으로부터 몰수한 미술품으로 채운다는 것도 놀라운 결단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시민들은 미술관으로 개방된 루브르 궁전의 회랑을 걸으면서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겁니다.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건설된 웅장한 회랑이 이제 시민들의 공간이 되었고, 지배층만이 누려왔던 미술품들을 시민들도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겁니다.
국민을 위한 미술관이 탄생하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자리한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는 여러 면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흥미로운 대칭점을 이룹니다. 영국은 최초의 공공 박물관으로 자부하는 옥스퍼드 애시몰린 박물관뿐만 아니라 영국박물관 등의 국립 박물관을 일찍이 설립하면서 박물관 역사에서 프랑스보다 한발 앞서갔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이 급성장하면서 영국의 문화적 자존심이 상당히 위협받게 됩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박물관의 중심을 ‘박물'에서 '미술'로 바꾸면서 영국 내에서도 순수미술을 중심으로 한 박물관을 설립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죠. 루브르 박물관의 규모와 화려한 미술품을 보고 돌아온 영국의 문화예술인들과 국회의원들은 영국 땅에 ‘국립 미술관이 없다는 것이 마치 모욕과도 같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824년 회화 전용 미술관이 내셔널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설립됩니다. 내서널 갤러리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러시아 출신의 유대계 사업가였던 존 앵거스틴의 소장품 구매었습니다. 앵거스틴은 선박보험회사인 로이즈 은행의 창립자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는데, 죽으면서 자신이 모은 38점의 회화작품을 국가에 판매 형식으로 기증합니다. 그러나 앵거스틴이 기증한 38점의 소장품은 국립 미술관이라는 명칭에는 한참 못 미치는 규모였습니다. 곧이어 여러 사람들의 기증과 구매를 통해 소장품이 점점 늘어나자 이제는 미술관 건축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설립 당시 내셔널 갤러리는 존 앵거스틴의 3층짜리 개인 저택을 개조해서 미술관으로 썼습니다. 소장품부터 전시장 규모까지 당시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수준이었고 이 때문에 자조적 비난과 조롱에 시달리게 되죠.
프랑스의 루브르처럼 영국 왕실 소유의 궁전, 예를 글면 버킹엄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영국 의회는 미술관 전용 건물을 새롭게 짓는 것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내셔널 갤러리는 1838년 트라팔가 광장에 완공됩니다. 당시 소장품 수를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는데, 이런 대담한 건축적 결정에는 프랑스의 루브르에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 작동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의 팽창을 바다에서 저지한 트라팔가 해전을 기념하는 광장에 내셔널 갤러리를 신축한 것도 다분히 국가적 자부심을 과시하기 위한 결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는 소장품이 2300여점, 연간 방문객 이 백만명이 넘는 세계 굴지의 미술관이지만 시작은 대단히 소박했습니다.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 대륙의 국가들이 왕실이나 귀족들의 소장품을 일반 국민들에게 공개하면서 공공 박물관은 ‘공화주의'나 '혁명'의 이념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졌죠. 이러한 논쟁 속에서 진보적인 성향의 휘그당이 1821년 집권하면서 비로소 영국 정부는 내셔널 갤러리의 설립을 허가하게 됩니다.
영국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같은 공공 박물관과 미술관은 세계의 주인공이 귀족과 소수 엘리트 집단에서 시민사회로 교체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당시의 정치가 토머스 와이즈 Thomas wyse는 '미술이 사치가 아니라 문명화된 삶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미술을 ‘강력한 만큼 보편적인 언어’로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미술이 몇몇 소수의 특권층에 한정된 세계가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는 미술 없이는 영국이 거둔 상업적 성공도 완벽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양정무 / ‘벌거벗은 미술관’중에서
'미술 . 문화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대에 맞선 신여성 ‘나혜석' (0) | 2021.09.03 |
---|---|
흑사병이 미술의 존재양식을 변화시키다 (0) | 2021.09.01 |
도무스 (0) | 2021.07.24 |
추사관 & 건축가 승효상 (0) | 2021.07.21 |
일두고택에서 정여창으로부터 (0) | 2021.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