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일두고택에서 정여창으로부터

송담(松潭) 2021. 7. 15. 09:51

일두고택에서 정여창으로부터

 

 

조선시대에는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도 동쪽의 안동과 서쪽의 함양에서 학문이 뛰어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선비의 고장 함양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개평마을은 깊은 역사를 이어 온 양반 마을로 유명합니다.

 

오늘은 함양 일두고택으로 떠나 조선시대 양반 가옥을 살퍼보고, 실천 유학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하며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킨 정여창 선생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집은 비바람과 추위 같은 외부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로, 당시의 사회 사상과 집주인의 개인 철학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전통 한옥에는 나무를 사용하여 기둥과 보 등으로 구성되는 구조체를 만들고 지붕에는 기와나 짚풀을 올리는 형태적 특징과 풍수지리, 도교, 유교 사상이라는 정신적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가옥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을 맞는 사랑채 영역, 안주인과 가족이 생활하는 안채 영역, 그리고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 영역입니다. 외부에서부터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차례로 놓여 있으며, 필요에 따라 별당채와 곳간채가 추가되면 모두 여섯 채로 구성됩니다. 각 채에는 각각 마당이 있으므로 여섯 마당이 되고, 마당마다 대문이 2개씩 달려 있다면 열두대문집이 됩니다. 그래서 '아혼아홉칸 열두대문집'이라는 표현은 최상류층 한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흙돌담 사이로 박석이 깔린 고샅길을 가면 일두고택의 대문이 나타납니다. 대문은 작은 길의 안쪽으로 나 있으며 길에서 볼 때 정면이 아닌 측면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는 집안 분위기를 안온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큰 길가에 대문을 내는 것을 피하고 집안 내부가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건축 구조입니다. 대문 좌우에 붙어 있는 행랑채에는 행랑아범이라고 불리는 하인이 머무르며 출입자를 통제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사랑채가 나옵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생활하는 곳으로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높은 기단 위에 누마루가 딸린 ㄱ자 평면의 건물을 세웠고 지붕에는 팔작지붕을 올려놓아 위엄과 품위를 더했습니다. 왼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인각문이 있고, 마당에는 박석을 깔아 놓아 동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채는 1843년에 중건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이 잘 살아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습니다.

 

오른쪽 높은 누마루에는 탁청재(濯淸齋) 라는 당호가 걸려 있는데, 흐트러진 마음을 맑게 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전통적으로 건물의 이름인 당호를 정할 때는 규모나 위계 및 용도에 따라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을 붙였습니다. 궁궐이나 사찰의 중심 건물에는 전을, 그 밖의 건물에는 위계에 따라 당, 합, 각을 붙였고, 재는 생활 거처나 서재 건물에 붙였으며, 헌은 대청이 있는 공적 건물을 이르는 명칭입니다. 이 밖에도 높게 지어졌거나 2층으로 된 건물은 루라고 부르고, 경치를 구경하는 정자에는 정을 붙였습니다. 2층 건물을 보통 누각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2층은 루, 1층은 각이 됩니다.

 

중문채 사이로 난 평대문 밖에 서서 안채를 들여다보면, 대청마루 부분만이 시야에 들어오도록 만들어져 있어 안채 공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지체 높은 양반집을 말할 때 '문턱이 높다.'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표현처럼 안채로 들어가는 문턱이 아주 높지만, 중앙 부분이 아래로 휘어 있어 편하게 넘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1690년에 지어진 안채는 건물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어 포근한 안마당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건물 사이가 적당히 트여 있는 열린 ㅁ자 형태의 배치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런 형태는 남부지방 가옥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안채 가운데에는 대청마루가 있고 그 왼쪽에는 안주인이 머무는 안방이, 오른쪽에는 맏며느리가 머무는 건넌방이 있습니다. 건넌방 아래쪽에는 난방을 위한 함실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사 등의 집안 행사가 열리는 대청마루는 반실내이자 반실외인 공간입니다. 보통 여섯 칸 면적의 넓은 대청을 말하는 '육간대청'은 가옥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인데, 일두고택에는 그보다 작은 네 칸 크기의 대청이 있습니다. 부엌, 즉 정지에는 튼튼한 판문이 달려 있으며 문 위쪽에는 부정한 것이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엄나무를 올려놓았습니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므로 일두고택의 가장 안쪽 높은 위치에 들어서 있습니다. 사당 건물에는 단정한 맞배지붕을 올렸고 비바람을 막기 위해 풍판을 좌우에 달았습니다. 고택 건물 중 유일하게 단청을 입혔고 입구 쪽 담벼락도 기와로 장식한 꽃담으로 되어 있어 건물의 품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사당 앞에는 곡식을 보관하던 거대한 규모의 곡간채가 당당하게 서 있어서 만석꾼이라 불렸던 가문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1450년 개평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개평마을은 그의 증조부가 함양으로 이사하면서 새롭게 터를 잡은 곳입니다. 그가 18살이 되던 해에 무관으로 근무하던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을 막다가 함길도에서 순직하자 2,000리나 떨어져 있는 길주까지 가서 부친의 시신을 수습한 뒤 함양까지 모셔오는 효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훌로 남은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술로 달래던 그를 어머니가 걱정하자 이후부터는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성종 임금이 주는 어사주까지 사양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병석에 드러눕자 감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했는데, 병세를 알기 위해 변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깊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몹시 슬퍼했고 어머니에게 빚진 채무자들의 빛을 탕감해 주어 고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런 효성이 알려져 왕이 내리는 포상의 대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상소를 다음과 같이 올리자 성종도 그의 아름다운 뜻을 칭찬했습니다.

 

소신이 효자가 될 만한 행실이 하나도 없는데 외람되이 전하의 은혜를 입으면, 신의 마음이 부끄러워 편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염치를 무릅쓰고 진출하는 폐단이 생길까 걱정되옵니다.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행실은 덮을 수 없는데 오히려 이처럼 사양하니, 이것이 그대의 훌륭함이다.

 

출세에 뜻이 없었던 정여창은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41세가 되는 해에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세자 시절의 연산군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연산군은 항상 강직하고 바른 행동을 요구하는 정여창을 싫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지방관을 자청하여 안음현감을 오랫동안 지냈는데 바른 업무 처리로 백성들의 많은 칭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여창은 평생의 벗인 김굉필과 함께 사림의 스승으로 존경받던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학연으로 인해,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하며 「조의제문」을 썼다는 이유로 발생한 무오사화에 그 역시 휩쓸리게 됩니다. 그는 종성으로 유배를 떠난 지 6년 만에 5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고, 같은 해 발생한 갑자사화 때는 무덤이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개평마을 인근에는 정여창의 뛰어난 학문과 인격을 기리기 위해 남계서원이 세워졌는데, 남계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곳입니다. 선생은 조선 성리학을 이끈 다섯 명의 학자인 동방오현으로 칭송받았고, 세상을 떠난 지 100년 후인 1610년에는 유학의 명현에게만 주이지는 최고의 영예인 동국십팔현으로 드높여서 문묘에 배향됩니다. 남명학과 창시했던 유학자 조식은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대유학자로 존경을 받는 유종(儒宗)이시다. 학문이 깊고 두터워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준 분이다.

 

선생은 자신의 호를 일두(一蠹)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한 마리의 좀벌레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스스로 자신을 낮춰 부르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호 수옹(睡翁)은 졸기를 잘하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이 이름에도 겸양과 위트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며 학문 연구와 백성을 위한 정치에 평생을 바친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일두고택 가문은 흉년과 전쟁으로 이웃이 어려울 때면 곡간을 열어 구휼미를 나누어 주는 등의 선행을 베풀면서 오랜 세월 동안 고택을 지켜 왔습니다.

 

개평마을 답사를 마치고 마을을 내려오면 푸른 들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낮은 자세로 바른 길을 가려 했던 정여창 선생과 일두고택 사람들의 마음도 이처럼 푸르렀을 것임을 깨닫게 되었던 가치있는 여행이었습니다.

 

여길우/ ‘우리 땅 더 넓고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출판 : 여행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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