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추사관 & 건축가 승효상

송담(松潭) 2021. 7. 21. 05:17

추사관 & 건축가 승효상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기도 했던 명문 경주 김씨가로, 지금도 예산에는 당당한 규모의 추사고택이 남아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학자와 명필의 소질을 보여준 그는 북학의 대가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합니다. 24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는데, 바로 그해 아버지가 중국 연경으로 가는 동지부사로 임명되자 김정희도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길에 동행합니다.

 

그는 북경에서 당대 최고 석학들을 만납니다. 특히 완원과 옹방강과의 만남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들 역시 김정희의 재능에 감탄합니다. 추사만큼 많이 썼던 완당이라는 호도 이때 만난 완원을 존경하는 뜻에서 지은 것입니다. 60일간의 연경 여행은 추사가 고증학과 금석학에 매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증학은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구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실증적인 학문이고, 옛 비석 등에 남겨진 명문을 연구하는 금석학은 고증학의 주요 분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귀국 후 옛 비문을 찾아 해석하기도 했는데,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처음으로 고증해 내는 업적을 이릅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탄탄한 출셋길을 걸어갑니다. 벼슬이 대사성과 형조참판에 이르고, 학문과 예술 방면에서도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55세 때에는 동지부사에 임명되면서 30년 만에 다시 연경에 갈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뜻하지 않게 정치 사건에 휩쓸린 그는 혹심한 고문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기까지 하는데, 그를 아끼는 이들의 구원으로 겨우 유배형을 받아 제주 대정현으로 귀양을 떠납니다. 제주까지는 거의 한 달이나 걸리는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결핍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더욱 괴롭힌 것은 고독감과 무력감에서 밀려오는 정신적 고통이었습니다. 찾는 이 하나 없고 말 붙일 사람 하나 없는 외로움이 이어졌고, 부인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절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 속에서도 학문과 서예에 매진하여 추사체를 완성합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서체를 연구하여 오직 자신만의 위대한 글씨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의 글씨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듯 신비롭고 능수능란해 보입니다. 날카로운 획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기도 하고, 쇠나 바위와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며, 괴이함이 주는 괴(怪)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대와 유행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김정희가 쏟았던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담담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다 닿게 했다.

 

 

 

이제 추사관으로 걸어갑니다. 이 전시관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중의 한 명인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으로, 세한도의 가옥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건축 지향을 '빈자의 미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빈자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하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물욕에서 벗어나 스스로 절제하며 사는 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과시하거나 드러내지 않습니다. 채움보다는 비움을 중요시하며 함께 공간을 나누고자 합니다.

 

승효상 건축가는 8년간의 유배 생활의 고독을 최고의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켜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를 기리는 미술관이라면 어설픈 욕망을 모두 제거하여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소담한 마을과 그곳을 감싸고 있는 성벽의 정취를 헤치짖 않도록 추사관 건축이 고개를 숙이고 마을 속으로 스며들도록 설계합니다. 그리고 전시 공간의 대부분을 지하로 들여 지상에는 작고 단출한 건물 한 채만이 보이도록 했습니다. 추사관이 완성된 후 대단한 건물을 기대했던 이웃 주민들이 기념관에 실망하여 '감자창고'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은 승효상 건축가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건축은 감자창고여야 했다.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계단 사이로 좁은 길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나 있습니다. 이곳까지의 험난했던 유배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김정희가 걸어온 삶의 굴곡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시 공간에는 추사의 치열한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영광과 좌절, 패기와 침잠, 그리고 고독과 관조를 거쳐 순수로 이어지는 추사 예술의 궤적이 잘 드러납니다. 땅 밑까지 내려온 선큰 가든 sunken garden을 통해 햇빛이 전시관 내부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어서 이곳이 지하 공간이라는 느낌은 거의 받을 수 없습니다.

 

 

추사영실로 불리는 지상 공간으로 올라옵니다. 등근 창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씨 중 '창문으로 많은 빛이 들어와 나를 오랫동안 앉아있게 한다.'는 뜻의 ‘소창다명(小窓多明) 사아구좌(使兒久坐)’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작은 창 아래 벽면에는 ‘판전(版殿)’이라고 적힌 글씨가 보입니다. 서울 봉은사 판전에 붙어 있는 편액 글씨로 마치 어린아이가 쓴 듯 맑고 순진해 보입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씨로, 이 글을 쓴 지 3일 뒤에 김정희는 세상을 떠납니다. 글씨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칠십일세된 과천 사는 노인이 병증에 쓰다.

 

 

이제 빛과 침묵만이 흐르는 빈 공간 끝에서 추사와 마주하게 됩니다. 조각상 속의 그는 조용히 아래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김정희는 제주 유배가 풀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멀고 추운 북청으로 유배에 처해집니다. 어쩌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불행한 운명에 그는 좌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그를 이끌어 주었던 힘은 바로 고아한 예술혼이었습니다. 이 흉상에는 고난을 딛고 돌아온 한 지식인이 세상을 관조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김정희는 1856년 71세의 나이로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명문가에 태어나 거침 없이 뜻을 펼치며 살다 세상으로부터 모진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좌절과 고통에 굴하지 않고 학문과 에술을 완성했던 그였습니다. 실록에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거리낌 없이 행동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고, 아우와 서로 화목하여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이름을 날렸으나 유배를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니,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해서 세상에서 그를 송나라 소식과 견주었다.

 

여길우/ ‘우리 땅 더 넓고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출판 : 여행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 위 글 제목 '추사관 & 건축가 승효상'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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