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시대에 맞선 신여성 ‘나혜석'

송담(松潭) 2021. 9. 3. 11:33

선구적 정신이 지핀 불꽃

 

시대에 맞선 신여성 ‘나혜석'을 만나는 길

 

 

수원의 명물인 화성은 조선시대 정조가 만든 계획도시입니다. 수원 화성에서 4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효원공원은 효심이 깊었던 정조를 본받아 효를 테마로 조성된 공원입니다. 도심 속 쉼터 같은 공간으로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공원 안에는 이런저런 동물로 변신한 정원수와 독특한 분위기의 중국전통정원(월화원)이 있어 볼거리가 쏠쏠합니다. 공원 앞에 길게 펼쳐진 보행자 전용 거리는 나혜석거리입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앉은 나혜석도 있고 화구를 들고 서 있는 나혜석도 있습니다. ‘나혜석거리'를 따라 카페와 음식점이 몰려 있어 수원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곳이지만 정작 이 거리에 왜 나혜석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거리의 주인공인 나혜석이 어떤 여인인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조선 신여성의 꿈과 사랑

 

나혜석에게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화가, 최초 여류 소설가, 세계 일주를 한 최초 여성, 최초 여권운동가 등 많은 별칭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혜석에게 하나 더 붙은 별칭은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불륜녀'였습니다. 나혜석의 모든 것을 덮어버린 가장 두툼한 별칭이자 죽음으로 몰고 간 질긴 별칭입니다.

 

1896년생 나혜석이 태어난 곳은 수원화성 인근입니다. 군수였던 나혜석의 아버지는 수원에서 알아주는 부자였습니다. 여성은 그저 집에서 얌전히 지내다 현모양처 되는 게 미덕이던 그 시대에 나혜석은 신식 여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삼일여학교를 거쳐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열일곱 소녀 나혜석은 오빠에 이어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동생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오빠의 권유로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2년 뒤 아버지는 그림쟁이 때려치우고 시집이나 가라 했고, 딸은 아버지 말을 무시했습니다. 이에 아버지의 유학비 지원이 끊겼고, 어쩔 수 없이 돌아온 나혜석은 1년 동안 미술학교 교사로 일한 돈을 모아 이듬해 일본으로 다시 떠났습니다.

 

그때 나혜석이 만난 첫사랑은 오빠의 친구였던 시인 최승구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집안에서 맺어준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사랑 없는 혼사였기에 최승구는 이혼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자 둘은 몰래 약혼했습니다. 문학청년과 미술학도의 절절한 사랑은 폐결핵 악화로 귀국한 최승구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끝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죽을 만큼 아팠던 나혜석은 간신히 몸을 추슬러 졸업 직전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을 강요하며 여자는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로만 살라는 가부장제 사회를 꼬집은 작품입니다.

 

졸업 후 고국에서 미술교사로 지내던 나혜석은 이듬해 3.1운동 참여로 체포됐습니다. 이때 나혜석 앞에 나타난 이가 김우영입니다. 그는 첫사랑의 죽음으로 가슴앓이하던 당시 나혜석에게 슬며시 다가와 사랑을 고백했던 교토제국대학 법대생이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그가 오래도록 가슴에 품었던 여인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5개월 만에 풀려난 나혜석은 전처와 사별한 10세 연상인 그 남자의 끈질긴 구애를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부모의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지켜본 나혜석은 결혼 전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 전처의 딸과 같이 살지 않을 것',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 줄 것' 이란 파격적인 조건을 김우영은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1920년 봄, 청첩장을 신문광고로 대신한 두 사람의 결혼식은 뻑적지근했고 신혼여행 중 최승구가 잠든 묘에 비석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사람들 입에 내내 오르내렸습니다. 염상섭의 <해바라기>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그들의 결혼과 기묘한 신혼여행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입니다.

 

불행을 낳은 '파리의 연인'

 

결혼 이듬해 나혜석은 조선 여성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연 개인전에 5,000명 이상이 몰렸고, 그 당시 직장인 평균월급이 30~40원일 때 그림 값을 300원씩 매긴 작품 수십 점이 완판될 만큼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듬해엔 조선미술대전에 입선하며 더더욱 유명인사가 됐지만 만주 부영사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매년 미술전에 출품해 입선도 하고, 특선의 영광도 안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소설과 시도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화가로, 작가로, 외교관 부인으로, 삼남매 엄마로 정신없이 살던 '워킹 맘' 나혜석에게 꿈같은 여행기회가 찾아왔습니다. 5년간 오지 근무를 한 남편에게 주어진 특별 포상여행이었습니다.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 전역을 두루 거치는 그들의 여행루트는 요즘 시대에도 대단한 여정입니다. 하지만 1927년 남편과 단둘이 떠난 그 여행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럽에 온 김에 김우영은 법 공부를 위해 독일로 가고자 했고 나혜석은 파리에 남아 그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이에 김우영은 때마침 파리에 와 있던 지인 최린에게 “아내를 보살펴 달라” 라며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잘못된 만남'의 시작입니다. 1920년대 파리는 문화예술의 황금기였습니다. 함께 미술관을 다니고 오페라를 보며 파리의 낭만을 즐기던 최린과 나혜석은 18년의 나이 차이였지만 결국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최린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지만 옥고를 치른 이후 친일파로 돌아선 사람입니다. 그 밀회가 남편 김우영의 귀에 들어가면서 두 사람은 2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이듬해 김우영은 간통죄를 빌미로 이혼을 요구했고, 나혜석은 향후 2년간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재결합하자'는 조건으로 이혼도장을 찍었습니다. 이후 김우영은 그 약속을 저버리고 이혼하자마자 다른 여인과 재혼했습니다. 최린도 자신과 밀회한 사유 때문에 이혼 당한 여인을 싸늘하게 밀어냈습니다.

 

인형이 아닌 '사람'의 삶을 외치다

 

홀로 남은 나혜석은 다시 조선미술대전에 입선하고 미술학교도 열어 재기하는 듯했지만 '불륜녀' 딱지로 문을 닫아야 했고, 원인 모를 화재로 그림까지 몽땅 잃는 불운까지 겹치자 세상은 벌 받은 것이라 조롱했습니다. 이에 나혜석은 1934년 '이혼고백서'란 장문의 글을 <삼천리> 잡지에 발표했습니다. 다음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비판한 내용 중 한 대목입니다.

 

'조선 남자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나는 사람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자신에게 퍼붓는 비난과 달리 밀회를 같이 즐긴 남자, 이혼 전부터 다른 여인과 동거하던 남편, 자신보다 고작 한살 많은 어린 첩까지 둔 아버지에게만 너그러운 세상을 향해 '여성 인권'을 외친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조선총독부 요직을 맡은 최린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보도되자 나혜석을 향한 세상의 시선은 더욱 싸늘해져 이듬해 열린 개인전은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그놈의 사랑' 때문에 빈 몸으로 쫓겨난 나혜석은 친정식구들에게도 버림받았고, 자녀들과 만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혜석에게 조선총독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이끄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 모든 지원을 해 주겠다는 제의였습니다. 최린은 이를 덥석 받아들였지만 나혜석은 단호히 거절하고 창씨개명까지 거부했습니다. 그 후 총독부 감시로 대인기피증까지 생겨 자취를 감췄던 나혜석은 광복 후 거리에서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어 시립요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48년 12월 겨울 밤, 나혜석은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무연고자 시신 공고에는 '신원 미상,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연령 65~66세'로 짧게 실렸습니다. 사망 당시 나이는 53세였습니다. 실제 나이보다 열 살 이상 더 들어보였을 만큼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 나혜석의 신원은 그 공고 이후에 밝혀졌습니다.

 

 

 

‘나혜석거리'를 알리는 기둥 옆에 파리 시절에 그린 자화상이 박혀 있습니다. 앞날을 예견한 얼굴이었을까요? 나혜석과 완전 딴판인 그림 속 여인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한복을 입은 나혜석 뒤의 벽면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넘을 수 없었던 보수의 벽을 상징합니다. 가부장제 모순을 사이다 발언으로 날카롭게 후벼 파기도 했지만 칼자루를 쥔 남성들 앞에서 칼날을 쥐고 덤빈 여인은 내내 상처만 입을 뿐이었습니다. 화구를 든 나혜석 동상 앞에 하늘을 훨훨 나는 사람 조형물도 있습니다.

 

“조상이 벌어놓은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 개나 마찬가지지요.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을 먹는 것이 사람인 줄 압니다.” 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외치던 나혜석의 자서전 소설 속 <경희>의 말입니다.

 

글/ 최미선 여행작가

 

출처 : 공무원연금2021.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