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이중섭과 소와 서귀포

송담(松潭) 2021. 11. 12. 03:42

이중섭과 소와 서귀포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사진출처: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마치 살아있는 듯한 소를 어떻게 그렸을까. 또 무슨 생각으로 소라는 대상을 선정해서 그렸을까. 그리고 굵고 거친 터치로 그린 소의 그림에 마음이 뺏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중섭 화가의 많은 것이 수수께끼였다. 역사의 파도 위에서 뒤틀렸던 한 개인의 삶을 뒤늦게 돌아본다는 일은 슬프다. 이 세상에 던져진 메시지를 그때의 시간으로 다시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몇 번을 방문했던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 앞이었다. 흘러가버린 화가의 기억을 더듬는 늦겨울 오후는 빠르게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푸른 바다만 고요했다. 맑고 투명해서 더욱 처연하고 바람은 불어도 공기는 포근했다. 파도 소리와 함께 벼랑을 향해 아낌없이 쏟아지는 폭포의 고함이 엄청나고, 그 소리와 냄새는 여전했다. 대향 이중섭이 머물렀던 곳은 '이중섭 거리'로 재단장되어 오가는 이들이 북적였다. 바다와 폭포와 나무들, 동백꽃까지 여전한데 정작 그의 모습은 없어서 낯선 풍경이었다. 몇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일본인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이 기증한 중섭의 팔레트가 유품으로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굶주림에 지쳐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난 그녀가 육필로 써보낸 편지 또한 애절하다. 빛바랜 종이봉투, 잉크를 찍어 펜으로 흘려 쓴 사부곡 앞에서 많은 이들이 떠날 줄을 몰랐다. 서귀포 서귀리의 연주 현씨 집 3평짜리 토방도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 모습대로 초가지붕 끝이 가지런하다. 솥단지 두 개를 걸고 아이들과 보리풀대죽을 쑤었던 곳, 목숨을 연명하던 고단한 삶이 녹아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네 식구가 벌거벗은 영혼을 보듬었던 날의 서귀포 언덕은 고통 그 자체였을 테다.

 

그는 갈매기와 바람의 기척을 회화의 언어로 그리고자 했다. 바다가 토해내는 찰나의 모습들을 화폭에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고픔을 견뎌내야 하는 인생살이는 예술과 병존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종이도 물감도 팔레트도 없었다. 사랑하는 마사코의 고단한 삶은 현실의 포로가 되어가고 어린 목숨들은 숨이 찼다. 그럼에도 이중섭은 한사람이 지니고 다녀야 할 최소한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 몸부림쳤다. 못 먹이는 애비의 미안함을 달래고자 그린 그림들이 군동화(群童畵)와 복숭아였다. 아이들 생각에 목이 메어 담뱃갑 은박지를 송곳으로 눌러 그린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아이>는 대향의 슬픈 인생이 스며들어있다. 이중섭의 소를 민족적이며 영웅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그의 소는 굴욕과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식민지 조선의 소였다.

 

높고 뚜렷하고 /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 두북 두북 쌓이고 / 철철 넘치소서 / 삶은 외롭고 / 서글프고 괴로운 것 / 아름답도다 여기에 / 맑게 두 눈 열고 / 가슴 환히 / 헤치다"

 

이중섭의 「소의 말」을 읽고 움직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눈으로 마음으로 반복했다. 초막집 헛간에 보존된 서러운 방, 1951년 피난살이에 지쳤을 중섭이 어느 날 밤 써붙인 소의 말이 가슴을 때렸다. 굶주림과 그리움 끝에 죽음, 쓸쓸했던 운명이 다가왔고, 그의 사촌이 발견한 뒤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단가다.

 

  <흰 소> 이중섭

 

 

그의 소는 격렬했다. 굵은 선에서 용틀임하는 골격의 절도가 살아있는 소를 끌어냈다. 도쿄유학 시절 일본에서 그린 소는 뼈만 앙상했었다. 소는 소였지만 한국의 소가 아니었다. 소의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그렁그렁한 슬픔에는 약탈당한 조국이 담겨있었다. 무거운 짐수레를 끌고 가는 소는 식민지 소년을 멈추게 했다. 살아있는 날 온전히 주인을 위해 근면하게 일하고 죽어서는 뼈와 가죽까지 모두를 남겨주는 소. 인간의 울타리 안에 공존하면서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영험한 동물이다. 평양 오산학교 시절 그는 들판에서 소를 보며 하루를 소 앞에서 보내곤 했다. 보고 또 보고 천만번 살펴야 소가 머릿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몸속에서 발효되고 육화된 소 한 마리가 비로소 하나의 조형으로 캔버스에 옮겨질 수 있었다. 소를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 가득 샘물이 차올랐다. 물은 넘쳐흘러 그의 온몸을 적셨다. 그의 육체가 탄화되어 소의 형상으로 남았던 것은 아닐까. 구름이 많아진 하늘은 바다를 덮고 이내 서귀포를 황혼 속으로 가둬버렸다. 어디 그림뿐이겠는가. 문득 돌아보면 산다는 것 전부가 오롯이 밑바닥을 채우고 그 안에 번져있는 고독과 그리움을 밀쳐내면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슬픔과 분노와 기다림의 온갖 무늬가 낙인으로 찍혀 인생을 짓누르더라도 한 사람의 품위를 잃지 않고 가야 하는 길. 그 묵묵함이 소와 인생의 접점을 무채색으로 합치는 경계, 이중섭은 짧은 일생 동안 그 경계이자 가장자리를 화폭에 남기고 떠났다.

 

 

 

고창에서 만난 인촌과 미당

 

 

질마재 언덕길 너머로 구름이 떠가고 깔끔하게 추수가 끝난 들녘을 지나 포근한 바다가 보인다. 동백꽃 절로 유명한 선운사의 정기를 지닌 고창 읍내 풍경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옛날 부자 농촌 모습 그대로다. 「국화 옆에서」를 읊조리며 청년 시절 내내 흠모해왔던 시인의 고향을 찾는다는 설렘에 먼 여행길인데도 고단하지가 않다. 늦가을 노란 국화로 뒤덮인 미당 서정주의 생가로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 민주화 그리고 번영을 목격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서정주는 60여 년간 활동하며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생가와 이웃한 미당 문학관에는 공간마다 그의 시와 시대별 사진기록, 소장품들이 빼곡하다. 「선운사 동백꽃」, 「국화 옆에서」, 「늙은 떠돌이의 시」, 「화사집」등 주옥같은 명작 시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미당 문학관을 돌아 나오니 공교롭게도 그보다 먼저 태어나 이미 시대를 주름잡던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눈길을 끈다. 호남의 부잣집 태생으로 와세다 대학 유학 후 고려대학교 설립과 동아일보 창간, 경성방직 창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1951년 부통령을 지내고 작고하기까지 김성수의 족적은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뚜렷하다. 미당과 인촌은 고창 사람들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미당이 어렸을 때는 변변한 산업 하나 없었고 들판에서의 농사만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이었고, 미당의 아버지 또한 경성을 주름잡던 인촌 밑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린 미당의 눈에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청년이 된 미당은 아버지를 떠나 개운사에서 산사 생활하기도 했다. 고향 마을 유지에게 굽실거리는 부친에 대한 시선은 그의 시 「아비는 종놈이었다」에 묘사되어 있다.

 

인촌이 사업가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정치가로 큰 물에서 잘 나갈 때 미당은 보잘것없는 문학청년이었다. 선운사를 무대로 잉태된 두 사람의 행적은 훗날 친일파 시비에 나란히 올라 시대를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을 만난다. 인촌은 경성방직을 경영하면서 조선총독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국방헌금을 납부하는가 하면 연설 때 부일협력을 강조하는 등 언론을 통해 황국사상을 두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당 역시 1940년대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伍長頌歌 발표로 일본을 찬양하는 문학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두 사람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의 명단에 나란히 올랐고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펴낸 친일인명사전 명단에도 함께 등재되어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는 시대의 아픔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각자의 도드라진 삶으로 절대 권력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던 상황이 만들어낸 상처였을 수도 있다. 인촌은 일제를 벗어나려면 교육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1926년 간디에게 청한 고언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라는 답신을 받고 그의 비폭력 교육사상에 심취해 민초들을 배우게 하고 독립자금 마련에도 열심이었다. 과(過)의 무게로 공(功)을 덮기는 쉽지 않다.

 

미당은 작가로서, 우리말을 다루는 천부적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리스 신화에서 출발한 초인정신, 보들레르와 이태백으로부터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을 두루 섭렵해내면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웠다. 생명파 초기의 탐미적 관능세계와 불교정신을 녹여낸 시어들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이뤘지만 친일의 오명을 씻어내지는 못했다. 그런 회한을 버리고 싶었을까. 미당은 노년에 킬리만자로부터 남태평양의 작은 섬까지 여행하면서 세상의 풍물과 철학을 노래했다. 1993년에 펴낸 『늙은 떠돌이의 시』를 보면 어쩔 수 없었던 과거를 참회한 흔적이 역력하다.

 

고창을 떠나는 동안 차창 밖으로 선운리의 봉우리들이 보였다. 이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생은 각기 다른 색깔로 채색되어 있다. 그들의 역사는 흘렀고 공과의 평가가 무성했던 시절도 지났다. 허물들이 세상을 달궜지만 이제 그마저도 시들하다. 누구나 고통의 시대에 온몸으로 나서면 절대적인 선은 없는 것 아닐까? 상념의 윤회가 어지럽다. 평가하되 시비하지 말고 용서하되 잊지 않는 마음이 중요할 것이다. 세월이 지나 지금 세상의 시각으로 돌아본다면 모든 결정이 시빗거리로 재단될 수도 있다. 역사는 때때로 사실보다 보고자 하는 시각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미당과 인촌의 시대 철천지원수였던 일본과의 지금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사상과 이념은 늘 실용이라는 현실을 앞서지 못했다. 그것이 우리들의 역사였다.

 

김경한 /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