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부석사에서 의상으로부터

송담(松潭) 2021. 7. 14. 14:51

부석사에서 의상으로부터

 

 

 

오늘은 건축미와 자연미 그리고 역사성을 두루 갖춘 영주 부석사로 떠나 사찰 건축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부석사를 세워 화엄종 불교를 완성함으로써 민족의 정신적 통합에 이바지했던 의상대사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찰은 수행자가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수행을 실천하기 위한 공간으로, 절, 가람, 도량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수행의 방법으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사찰은 번잡한 도시를 떠나 참선 수행에 집중하기 좋은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산사는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을 가장 높은 곳에 두고 나머지 부속 전각을 불전 주위에 배치합니다. 이에 따라 가장 낮은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불전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올라가는 구조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그 수미산 정상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구현한 것입니다.

 

부석사 경내의 시작을 알리는 일주문이 나타납니다. 일주문은 사찰의 첫 번째 문으로, 지금부터는 속세를 벗어나 성스러운 불법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개의 기둥이지만 한 줄로 서 있기에 일주(一住)라고 부르는데,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진리릐 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전통 건축에서 글씨를 크게 적어 달아놓은 나무판을 보통 현판이라고 하는데, 특히 건물 정면 문 위에 걸어놓은 현판을 편액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한시 등을 써서 기둥 위에 세로로 달아놓은 글자판 주련이라고 합니다.

 

일주문 다음으로 나오는 사찰의 두 번째 문은 천왕문입니다. 지국천왕, 광목천왕, 중장천왕, 다문천왕의 네 수호신이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으며, 칼이나 탑, 용, 비파 등 각자 임무에 맞는 지물을 손에 들고 사찰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범종루 아래를 지나면 하늘로 날아오를 듯 보이는 안양루가 나타납니다. 건축 중심축이 살짝 틀어지며 비스듬히 서 있는 안양루는 부석사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건축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안양루 아래의 문은 안양문으로 부릅니다. 사찰의 세 번째 문이자 마지막 문으로, 안양(安養)은 극락정토를 뜻합니다. 안양문은 가람 배치 중 가장 후방에 위치하는 불이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둘이 아니라는 뜻의 불이(不二)는 분별이나 대립을 떠난 절대적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 불이문을 통과하여 불전으로 나아가면 마침내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해서 해탈문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안양문처럼 낮고 어두운 누각 밑을 통과하는 것을 누하진입(樓下進入)이라고 합니다. 이는 머리를 저질로 숙이게 만들어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고 어두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얻는 순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안양문을 지나면 드디어 주불전인 무량수전에 도달합니다. 지금까지 일주문, 천왕문, 안양문의 세 문을 차례대로 통과해 불전까지 울라온 행위는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 온 길고 힘든 수행의 과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제 불전 앞마당에 서서 무량수전을 바라봅니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의 하나로, 건립 시기는 고려 때인 1200년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화재와 자연재해에 취약한 목조 건물이 800년 동안이나 그 생명을 유지해 온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승려에 대한 호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조사(祖師)는 종파를 창시한 승려를, 종사(宗師)는 종파를 계승하여 부흥시킨 승려를 부르는 존칭입니다. 이 밖에도 덕망 높은 큰 스님을 대사나 화상이라고 부르고, 불법, 참선, 계율에 통달한 스님을 각각 법사, 선사, 율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의상은 삼국의 세력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625년에 태어났습니다. 진골 신분이었던 그는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에 선진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시도합니다. 그때 해골물 일화로 알려진 사건이 일어납니다.

 

큰비를 만난 두 사람은 비를 피해 토굴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러데 밤중에 목이 말라 달게 마셨던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경악하며 구역질을 합니다. 이때 원효는 더럽고 깨끗함이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와 일이 결국 마음에 달렸다는 진리를 깨달은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가 불법을 전하기로 결심합니다.

 

원효와 헤어진 의상은 홀로 당나라 입국을 시도하여 성공했고,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을 찾아가 화엄 사상을 공부합니다. 화엄을 완전히 이해한 그는 우주 만물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하여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라는 화엄의 중심 교리를 단 210자만을 사용해 「화엄일승법계도」로 정리합니다. 그는 화업엄에 대해 이렇게 설파합니다.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니 작은 티끌 속에 세계를 삼켰네.

 

그때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상은 신라로 급히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후 동해의 한 동굴에서 만난 관세음보살의 말에 따라 낙산사를 창건합니다. 중생의 괴로움을 듣고 이를 구제하는 분인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관음 신앙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당을 몰아내고 완전한 통일을 달성한 676년에 의상대사는 왕명에 따라 군사요충지였던 죽령 근방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해동 화엄종의 시작을 알립니다. 통일과 융합을 원리로 삼는 화엄 사상은 새로운 통일 왕국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어 민족의 통합에 공헌하게 됩니다. 이후 부석사에서 78세의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대사는 전국에 화엄십찰을 지었고 그가 키워낸 제자들은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갑니다.

 

의상대사의 업적을 말할 때면 원효대사가 자주 소환되곤 합니다. 두 사람은 신라 불교를 완성한 사람이지만 각자의 전교 방식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교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원효는 민중의 고된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뒹굴며 법리를 전했습니다. 이와 달리 의상은 진골 귀족 출신으로 정치 세력에 친향적이었고 화엄사상도 결국 지배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적 문제 제기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의상을 향한 이런 비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사는 화엄종이라는 세련된 교리로 부처님의 말씀을 이 땅에 구현하려 했고, 항상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통일 이후 문무왕이 왕도에 새로운 성을 쌓으려 하자 왕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내 공사를 중지시킨 일은 그의 애민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의 다스림이 밝다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넘지 않을 것이지만, 정치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재해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의상의 10대 제자 중에는 노비처럼 천민 출신도 있었는데, 이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을 평등하게 대했던 그의 자비심을 증명합니다. 또 대사가 부석사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왕이 땅과 노비를 보냈지만, 법의와 발우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불교의 법은 지위나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이를 평등하게 대합니다. 부처님은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을 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제가 땅과 노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소승은 부처님의 진리를 집으로 삼고 밭갈이를 하여 곡식이 익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이처럼 세속의 정치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심을 실천하고 중생을 구제하려 했던 의상대사의 정신이 곧 부석사의 창건 이념이며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석사를 지탱해 온 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덧 석양이 내려앉은 소백산 자락 사이로 부석사의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웅장한 자연 입지, 800년을 이어온 무량수전, 정교한 건축 구성, 극적인 시퀀스 등 부석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에다가 감동적인 이 장면 하나를 더 넣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듯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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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에서 김영환으로부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불(佛), 부처님의 말씀이자 진리인 법(法),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하는 승(僧), 이 세 존재를 세 가지 보물이라는 뜻에서 삼보(三寶)라고 합니다. 이러한 삼보를 모시는 삼보사찰이 있는데,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불보사찰통도사, 부처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모시는 법보사찰인 해인사, 그리고 많은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인 송광사입니다.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불법의 힘으로 국가위기를 이겨 내기 위해 간행한 팔만대장경은 7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인사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위험을 무릅쓴 선각자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해인사는 의상대사가 이 땅에 이식한 화엄사상이 꽃을 활짝 피운 사찰입니다. 의상대사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순응과 이정 스님이 802년에 창건하여 1,2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해인사는 고려 태조 왕건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사세가 급격히 커졌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대가람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 왔습니다.

 

불가에서는 불교의 삼장(三藏)을 모두 모아 집대성한 경전을 대장경(大藏經)이라 부릅니다. 삼장이란 부처님의 말씀인 경장, 수행자가 지켜야할 규율인 율장 그리고 고승들의 해석과 연구의 결과물인 논장을 말합니다. 여기서 장이란 바구니를 뜻하는데, 불교에서 받드는 진리를 담아놓은 저술의 집합체를 의미합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 현장의 삼장법사라는 호칭은 바로 이러한 삼장에 통달한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전 세계로 전해지며 경전이 방대해지자, 이를 정리하여 목판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동아시아에서 나타납니다. 중국 북송이 최초의 목판 대장경을 제작했고, 이후 고려에서도 1087년 목판 대장경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고려 초조대장경입니다. 이후 이를 보완한 속장경이 간행되었지만, 현재 이 두 가지 장경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신한 고려 정부는 부처님의 힘을 빌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대장경 간행을 다시 시작했는데, 16년 만인 1251년에 재조대장경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관 대장경입니다. 모두 81,258매의 경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글자 수만 해도 5,200만 자가 넘습니다. 경판을 쌓으면 3km가 넘고 무게만도 총 28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송과 거란의 경관을 참조했기 때문에 당대의 모든 문헌을 포함할 만큼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오탈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모든 글자를 한 사람이 쓴 듯 동일한 서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계산에 따르면 8만 장의 경판을 옮기기 위해서는 400기 이상의 달구지가 필요했고, 만약 사람이 머리에 이고 옮겼다면 건장한 남성 8,000명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실로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경판 어느 부분을 살펴보더라도 경판 운송 중에 생길 수 있는 마찰 흔적이나 흠집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경판을 옮겼던 불자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알 수 있는 것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모신다는 깊은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대장경을 둘러싼 도 다른 신비는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팔만대장경 거의 훼손되지 않고 장경판전에서 완벽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특히 목관은 습기에 취약하여 습도 조절이 매우 중요한데, 장경판전에는 바람이 잘 드나들도록 하려는 특수한 통풍 설계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건물 전면에는 위쪽 창보다 아래쪽 창이, 후면에는 아래쪽 창보다 위쪽 창이 더 크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자연 통풍이 잘 일어나도록 고안한 장치입니다. 현대에 실시한 시물레이션 결과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951년 9월 18일,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한 주역 중의 한 사람이고 공군의 상징이 된 빨간 마후라를 처음으로 맨 인물로 알려진 김영환 공군 대령은 북한군 은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전투기 편대를 이끌고 출격합니다.

 

그런데 작전 수행 도중, 해인사에 북한군이 숨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니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이 그에게 떨어집니다. 순간 김 대령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만일 지금 해인사에 숨어 있는 적군을 공격하면 적군은 소탕되겠지만 세계적 유산이자 국보인 고려대장경 역시 완전히 소실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미치자, 팔만대장경의 피해를 막기 위해 그는 편대의 공격을 중지시킨 후 적군의 집결지와 보급품 저장소로 보이는 해인사 뒷산 지역만을 공격하고 기지로 귀환합니다. 자칫하면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를 보호한 것입니다.

 

해인사로 올라가는 숲길 한편에는 경판 모양으로 만든 김영환 장군 공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과감한 결단력으로 장경판전을 보호한 그를 기리며 해인사에서는 해마다 추모재를 지내고 있고, 2010년 정부는 대장경을 수호한 공로를 인정하여 김 장군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이처럼 무수히 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팔만대장경이 온전히 보존되어온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지켰던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국난 속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경판을 새긴 판각수가 있었고, 멀고 험한 길을 걸어 경판을 옮겼던 불자가 있었으며,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경관을 구했던 스님이 있었을 것이고, 명령불이행에 대한 처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경판을 지켜 낸 군인이 있었습니다.

 

여길우/ ‘우리 땅 더 넓고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출판 : 여행이 필요한 시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