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중에서

송담(松潭) 2021. 5. 19. 06:13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중에서

 

 

 우리가 별 생각없이 쓰고 있는 선불교라는 말자체가 알고 보면 매우 이상한 개념입니다. 불교면 그냥 불교이지, 선불교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종(禪宗)이라는 종파가 중국 당나라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실제로 선종의 본래면목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것은 조선불교일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송대 이후 불교다운 불교가 점점 인멸하여 지금은 그 진면목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불교를 선종이라는 종파적 의식 속에서 바라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선불교: 인도불교의 중국화 과정

 

 선불교는 물론 인도불교에 없는 개념이고, 인도불교사에는 선종이라는 종파가 성립한 적이 없습니다. 기실 선불교라는 것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점점 중국적인 풍토와 언어와 심성, 그리고 사회적 여건에 적응하여 간 종국에, 다시 말해서 인도불교의 중국화 과정의 정점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불교의 모습일 뿐이죠. 불교의 변화상일 뿐이죠. 산문적인 불교가 운문적인 불교로, 논리적인 불교가 초논리적 불교로, 논술적인 불교가 시적인 불교로, 다시 말해서 산스크리트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가 고전중국어의 틀 속의 사고체계로 변해가는 과정의 극단적 사례가 선불교의 제반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라는 말은 본래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말이 아닙니다. 다나dhyana(산스크리트어), 자나jhana(팔리어)의 음역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원래 선나"라고 썼던 것인데, 약해서 ""이라 한 것이죠.

 

 다나라는 것은 뭐 특별한 제식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명상’ ‘정신집중’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심신을 통일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의역할 때는, ’정려‘(고요히 사색한다), (,마음을 한 군데로 정한다), ’사유‘(생각한다), ‘수정(修定) 의 단어가 쓰였습니다. 정려, 집중, 정신통일과 같은 의미로 쓰는 말이 바로 삼매(三昧)’(삼매도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일 뿐, 그 자체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뜻으로 하면 '세 가지 우매함'이 되는데 전혀 가당치 않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나 삼매는 그냥 비슷한 옛 인도말입니다.

 

 그리고 또 비슷한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요가yoga"라는 말이지요. 우리나라에 "요가"는 아주 흔한 운동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를 하시겠네요. 요가는 "매듭짓는다" "묶는다"라는 뜻의 동사 '유지yuj-"에서 파생된 말인데 그것은 결국 해탈을 향한 깨달음의 수련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묶는다." “마음을 결속 킨다'는 뜻이니까" ‘심신통일’ ‘정신집중등의 말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교와 선, 이와 사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불교를 선종이니 교종이니 운운하고, 이판(理判, 좌선수행을 주로 하는 선승)이니 사판(事判, 조직운영을 책임지는 살림꾼들)이니 하여, 분별적으로 이해하는 모든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합니다. 불교사를 다루는 데 있어 방편적으로 쓰지 않을 수 없는 개념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와 선()이 양대산맥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교종 · 선종을 운운하기 전에 불교 그 자체를 고구(考究)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를 많이 하는 학승은 선경(禪境)이 높질 못하고, 좌선만 하다가 득도했다 하는 스님들은 무식하기 그지없다고 스님들이 서로서로 비난하는 소리가 잘 들려와요. 선과 교를 분별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이런 대립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서산대사나 경허대사나 그런 류의 대덕들이 모두 치열한 선적인 구도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오늘 우리에게 추앙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교학불교의 마스터라는 데에 있습니다. 지눌도 그러했고, 원효의 시대에는 선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

 

 출가자는 비구(比丘), 여성출가자는 비구니(比丘尼)라 했는데, 비구는 "빌어먹는다"는 뜻입니다. 비구는 반드시 탁발수행을 해야 하며 물건을 사취할 수가 없습니다. 비구가 된다는 것은 계를 받는다는 것인데 비구가 지켜야 할 계율이 250가지나 되었습니다. 요즈음 스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수행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삶의 목표는 시건방지게 금방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각자인 싯달타가 남겨놓은 가르침에 따라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대체적인 수행방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

 

 우선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불경스럽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승 불교는 이미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자각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출가자 비구들의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재가자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종교운동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나라의 비구승가를 특별한 권위체로 인정하는 모든 체제는 사실 소승이지 대승이 아닙니다. 비구는 빌어먹기만 할 뿐,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비구는 돈, 권력, 절깐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초기 승려들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 내의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은 후대에 생겨난 방편일 뿐입니다. 초기대승불교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습니다.

 

 

 6바라밀의 등장

 

 여러분! 대형버스와 고급자가용 세단과 뭐가 다를까요? 버스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해서 세단은 안면이 있거나 신분이 있거나 특수관계에 있는 소수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싼 버스표만 있으면 탈 수 있지요. 작은 수레(소승)와 큰 수레(대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계율의 문제입니다. 소승은 계율이 250가지나 되는 매우 복잡한 자격을 지녀야 올라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에게는 그러한 계율이 무의미했습니다. 세목의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널리 구원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같이 큰 수레에 태워야 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려면 계율이 유연성 있게 운영되어야 하고 또 혁파될 것은 혁파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새로운 대승의 실천원리가 이른바 "6바라밀(육도)이라고 하는 것이죠.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라는 것인데, 250계율과 같은 것에 비하면 매우 일반화 되고 추상화 되고 유연성 있는 원칙이 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6번째 지혜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반야인데, 6비라밀은 반야의 바라밀에서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서 앞의 5바라밀은 6바라밀을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한 것이죠.

 

 

반야 바라밀다 심경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 行深般若波羅蜜多時(행심반야바라밀다시), 照見(조견)

 五蘊皆空(오온개공),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에 오온이 다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고통과 재액)을 뛰어넘으셨다.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관자재보살"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야심경전체의 주어가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설법의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죠.

 

 

 관세음보살은 중성이지만 여성적 이미지가 강하다

 

 관세음보살은 그 여성직 이미지와 함께 우리 주변에 그 모습이 널려져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피하겠습니다. 석굴암의 벽면에 릴리프로 새겨진 관세음보살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지요,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와 더불어 태어난 캐릭터이며 AD 1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관세음보살상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쿠샨왕조시대(1세기 중엽에서 3세기 증엽까지) 간다라 지방에서였습니다. 불타 본존과 양협시로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이 같이 조각된 것도 있고, 관세음보살만 독자적으로 조각한 입상도 많습니다. 이 관세음보살은 철저히 대승운동의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정신하에서 탄생된 것입니다. 자비와 구제의 심볼로서 태어난 것이죠.

 

 관자재, 관세음의 뜻

 

 원래의 이름은 Avalokitesvara 인데 이것은 "보는 것, 관찰하는 것avalokita이 자유자재롭다isvara"는 뜻이니까, 사실 "관자재보살'이라는 현장의 번역이 원의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라집은 "관세음보살 "이라는 번역을 선호했습니다. 묘법 연화경을 번역할 때도 라집은 "관세음"과 더불어 "관음"이라는 역어를 썼습니다.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은 완전히 같은 말입니다. 관자재보살은 원어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우리 민중은 라집의 "관세음보살"이라는 표현을 사랑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소리를 본다"가 되어 좀 이상하지만 인도인에게 '본다"는 것은 심안의 감지, 통찰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주석가들에 의하면 "관세음""본다"보다도 "보여준다"의 의미가 강하다고 합니다. 세상의 고통스러운 소리들, 그 현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보살! 그래서 11면의 얼굴을 지닌(온갖 소리를 동시에 들어야 하니까) 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지요.

 

 오온이란

 

심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알아야 할 테크니칼 텀 technical term이 바로 "오온"이라는 것입니다. "빤차 스칸다 panca-skandha "를 말하는데 "다섯 가지의 집적태"라는 뜻입니다. 한자의 '()'쌓였다" "축적되었다." "모여 이루어진다"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오온(五蘊)이란 이 다섯 가지 집적태로써 우주의 일체 존재가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우주관을 나타냅니다. 초기불교의 핵심이론이지요:

 1) () 2) () 3) () 4) () 5) ().

 

 이 중에서 색()은 물질적 요소를 총칭합니다. 공간을 점유하는 연장태, 그 모든 것을 가리키지요. 지수화풍(地水火風)4요소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도 색()입니다. 한문상으로도 좋은 번역이지요. 색깔 있는 것은 곧 빛을 반사하는 물체이므로 색()이 곧 물질matter을 대변한 것입니다. 5온 중에서 색온을 제거하면 나머지 4온은 모두 정신적인 것이지요.

 

  수온(受蘊)은 눈으로 색을 본다든가 귀로 소리를 듣는다든가 하는 감각기관의 감각작용(perception)을 의미합니다. 상온asamjna은 보통 표상작용representation이라 번역하는데, 역시 한문의 뜻대로 "생각한다"로 해석하면 족합니다. 보고들은 것을 가지고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행온은 "samskara"의 번역인데 'sam'은 행한다는 뜻이지요. 의지적으로 동작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의지작용(volition)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식온vijnana'vi(분별하여)+jna(안다)'는 뜻인데 판단력을 갖춘 우리의 의식작용을 말합니다.

 

 

 舍利子(사리자)!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受想行識(수상행식), 亦不如是(역부여시)

 

 사리자여! 오온개공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색이 공에 다르지 않고, 공이 색에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나머지 수·· 행· 식도 이와 같다는 뜻이다.

 

 

 심반야바라밀다를 행한 관자재보살은 오온이 개공이라는 우주적 동찰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고액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문 중에서도 지혜 제일이라는 사리자를 골라, 사리자에게 오온개공의 이치를 설파합니다. 사리자를 특칭했다고는 하지만 "사리자"를 선택하여 골라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인즉 바로 ""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반야심경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관음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이 "수상행식, 역부여시"의 뜻을 정확히 새기지 않습니다. 보통 독자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잘 알아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한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을 유실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색도 공이요, 수도 공이요, 상도 공이요, 행도 공이요, 식도 공이다.

 

 ()의 세계가 영성계라구? 개똥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책들을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해석하여 색의 물질세계에 반하여 공의 세계는 영성계 라고 하는 다양한 구라가 많아요. 이런 개똥같은 담론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또다시 공()을 실체화 하고, 불교의 근원을 왜곡하여 얄팍한 장사를 해먹으려는 수작일 뿐이지요. 다시 말해서 공()을 빙자하여 예수쟁이들 구미에 맞는 불교를 만듦으로써 새로운 영성을 운운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더욱 한심한 일은 적지않은 스님들이 이런 엉터리 담론에 귀가 여리다는 것이지요.

 

 시달타의 깨달음은 연기 하나!

 

 싯달타가 보리수 밑에서 깨닫은 것은 "연기" 하나입니다. 연기라는 것은 이 우주의 모든 사태ovent, occasion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수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만 이벤트, 해프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연(因緣)이라는 것도 인()은 주원인이고, ()은 그 주변에 묻어있는 수없는 보조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이 사라지면 존재(사태)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공()입니다. 공은 철저히 공()일 뿐이지요. 이러한 우주론적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나의 오도송은 이러한 명제를 외쳤던 것입니다.

 

 나는 좇도 아니다.

 

 이것은 "나는 공()이다"라는 우주론적 명제를 일상적 윤리명제로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막말로 나는 좆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좆이나 된 것처럼 폼 잡고 살지 말자는 것이지요. 나는 아버지 덕분에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부족한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매사에 꼼꼼하고 철두철미했습니다. 내가 스무 살 전후에 이 반야심경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매우 자신있고 오만하고 융통성 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심경을 만나,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얻어 "나는 좆도 아니다'라는 공의 진리를 터득하여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사회를 생각하고, 타인의 고액을 동감하고, 진리에 대하여 개방적 자세를 유지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공부하고 끊임없이 배우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보살

 

 ‘보리살타bodhisattva’ (깨달음을 지향하는 유정(有情).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닌 보통사람, 즉 싯달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의 약어가 곧 "보살"이며 그것은 대승운동의 주체입니다. 아라한을 뛰어넘는 새로운 불교의 주체입니다. 결국 반야경의 핵심이 심경이 설파된 것은 보살에게 설파된 것이고 그 설파된 내용의 최종적 수혜자는 비구가 아닌 보살입니다. 대승의 수혜자가 되려면 비구도 보살이 되어야만 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라는 주문은 단지 음역일 뿐이므로 한자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 원래 발음은 매우 명료합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āhā

 

 이 산스크리트어의 뜻은 비록 주문이지만 명료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너간 자여 (아제)

 건너간 자여! (아제)

 피안에 건너간 자여! (바라아제)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자여! (바라승아제)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보리 사바하)

 

 마지막의 "스바하""행복하소서!"" "만세!'의 뜻으로 인도인들이 인사말로 흔히 쓰는 용어입니다.

 

 이 주문은 종교적 주술로서 해석되면 곤란합니다. 여기 숨은 주어는 당연히 관세음보살입니다. 건너간 자,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자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누구입니까? 나는 이 텍스트의 첫머리에서 이 심경을 읽고 있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심경은 궁극적으로 내가 나에게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관세음보살이 누구입니까? ""가 누구입니까? 이 나는 바로 보살혁명, 새로운 반야혁명의 주체세력입니다. 보리 사바하!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라는 뜻은 보살혁명의 주체세력들에게 바치는 헌사eulogy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주문을 외우면서 바로 여러분들의 시공간 속에서 새로운 보살혁명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의 궁극적 의미이겠지요.

 

 도올 김용옥/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