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연기의 세계, 인연의 세계 혹은 인과의 세계

송담(松潭) 2020. 8. 2. 15:19

연기의 세계, 인연의 세계 혹은 인과의 세계

 

 

 

첫째로 '연(緣)'을 강조하는 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의 연기의 논리, 둘째로 '인'과 .연'을 동시에 강조하는 동아시아 불교의 인연의 논리, 셋째로 '인(因)'을 강조하는 일상적인 인과의 논리다. 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가 피력한 연기의 논리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세 가지 논리를 조금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물을 끓인다고 해보자. "불을 가하면 물이 끓는다"는 문장은 전형적인 '인과의 논리'를 보여준다. 물에 열을 가한다는 행위가 '원인'이 되고 물이 끓는 현상이 '결과'가 된다. 그렇지만 인과의 논리에는 '불을 가하면 물이 끓는' 현상 이면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무관심에 방치되기 쉽다. 생각해보라. 물을 담은 용기가 플라스틱이라면 어떻게 될까? 차갑고 강한 바람이 불면 어떻게 될까? 불을 붙일 의지를 가진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등 커피를 마시려고 물 한 잔을 끓이려면 이렇게 많은 '연들'이 필요하다. 결국 불도, 물도, 산소도, 냄비도, 바람도, 습도도, 인간도 모두 '연'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연들이 화합해서 한 잔의 끓은 물이라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한 잔의 끓은 물'은 만들어질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가 말한 '연기의 논리'다.

 

연기는 어떤 존재가 만들어지려면 복수의 연들이 화합하거나 혹은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동아시아 불교 지성인들은 일종의 수정주의적 타협을 시도한다. 복수적인 연들이 중요하다면, 그중 관심이 집중되는 연 하나를 '인'이라고 놓고 나머지는 '연'이라고 놓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적 관심을 갖는다면 '불'을 '인'이라고 놓고, 나머지 물, 냄비, 산소, 바람, 습도, 인간, 그리고 컵 등은 '연'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혹은 인간적인 관심을 갖는다면, '인간 을 '인'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불, 물,냄비, 산소, 바람, 습도, 컵 등을 '연'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연의 논리'다. 인연의 논리에 따르면 '인'은 그때그때 관심사에 따라 달라진다.

 

조금 도식적일 수 있지만 편의상 징리해보자면, 생성을 설명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다양한 연들이 존재를 만든다는 '연기의 논리', 둘째로 하나의 원인과 많은 조건들이라는 '인연의 논리', 그리고 셋째로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라는 ''인과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과의 논리는 인연의 논리로부터, 혹은 저 멀리 연기의 논리로부터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논리는 지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느 논리에 따라 살아가느냐에 의해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미래는,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육아나 교육의 사례로 세 가지 논리의 상이한 효과를 생각해보자.

 

'연기의 논리'에 따르면 아이도, 신생님도, 친구도, 어머니도, 아내지도, 가족도, 주변 환경도 모두 '연'이다. 이 중 하나의 연이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잘 자랄 수 없다. 아이가 잘 자랐다고 하자. 어머니, 선생님, 친구, 환경 등이 다행히 '연들'의 근사한 앙상블을 만든 셈이다. 하나의 연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한 어머니는 아이의 선생님이나 아이의 친구에게 하염없이 고마워한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연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연기의 논리다.

 

반면 '어머니'가 절대적인 인이고 '아이', '선생님', '친구들' 등은 불변하는 연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노력으로 아이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과 친구마저 통제하려 할 것이다. 심지어 이 어머니아이의 모든 관계나 활동을 자신이 통제하려 할 것이다. 결국 아이가 잘 자라지 않으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어머니의 책임이 된다. 바로 이것이 '인과의 논리'가 가진 무서움이다. 이 경우도 아이가 훌륭한 사람으로 싱장하기는 힘들다. 아니 성장은커녕 아이의 내면과 삶은 완전히 황폐화할 수도 있다. 하나의 원인이라는 발상은 이렇게 무서운 집착을 낳으며, 그 결과는 파괴적이다.

 

'인연의 논리'는 조금 더 실용적으로 접근한다. '아이'가 인이고 '어머니'나 '선생님' 혹은 '친구'들이 연일 때도 있고, '어머니'가 인이고 '아이', '선생님', '친구들'이 연일 때도 있다는 입장이다. 무언가 융통성이 있는 듯 보이지만 인연의 논리는 특정 상황에 어떤 연을 인으로 중시하고 나머지 연들의 주도권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원인에 대한 집착의 강도만 완화되었을 뿐 원인에 집착하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불변하는 원인도 문제지만 가변적인 원인도 동일한 문제를 낳는 것이 아닐까.

 

맛있는 커피 한 잔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인연의 논리나 연기의 논리에 따르면 이 커피는 수많은 악기들의 연주가 화합되어 들리는 교향곡과 같다. 라흐마니노프(Sergei Rakhmaninov, 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Piano Concerto No. 3)>을 들을 때 아마추어는 과거에 CD로 들었던 것과 유사한 음악을 들을 뿐이다. 짐짓 "음, 연주가 매우 좋군"이라며 자신의 음악 취향이 꽤 수준 높다는 것을 뿌듯해하면서. 하지만 음악을 잘 듣는 사람은 연주를 더 섬세하게 감상한다. "이 부분에서 제2바이올린 소리가 좀 이상한데?" 하며 고개를 갸우똥거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음악 애호가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지휘자의 수준을 넘을 수는 없다. 수주 동안 치열하게 연습을 하며 그는 협주곡의 전체 소리뿐만 아니라 수십 명 단원들의 개별 연주 소리도 듣는다. 그러니 간혹 연주를 멈추고, 비올라를 연주하는 단원에게 "그 부분은 더 꾹 눌러 연주하면 좋을 것 같다"고 충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커피 맛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 앞에 놓인 커피의 향에도 특정한 불, 특정한 물, 특정한 산소, 특정한 주전자, 특정한 바람, 특정한 습도, 특정한 원두, 특정한 잔, 그리고 특정한 인간의 의지가 모두 들어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불의 온도가 조금만 변해도, 수질이 조금만 달라져도, 주전자의 열전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주방의 풍향과 풍속이 달라져도, 원두를 보관하는 습도가 달라져도, 커피의 원산지가 달라져도, 커피를 담은 컵의 재질이 바뀌어도, 나아가 커피를 잔에 담아 가지고 온 사람의 마음 상태가 달라도, 동일한 커피로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커피가 될 수밖에 없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개별 연주자들의 연주도 들어야하듯, 커피의 맛과 함께 그 맛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인연을 포착할수 있어야 한다. 결국 '연들에 의해 발생한 존재'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연들'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거대한 전체와 함께 그것을 이루는 미세한 디테일들!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한 잔의 커피 맛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도 '연들에 의해 발생한 존재'이다. 개별 인간 한 명 한 명도 '연기'에 의해 생성되고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 / ‘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