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마음 수양의 비결, 돈오점수

송담(松潭) 2018. 10. 16. 17:18

 

마음 수양의 비결, 돈오점수

 

 

선불교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보조 지눌은 한국 불교의 '' 철학을 완성해 한국 사상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고려시대는 동아시아의 정세 자체가 아주 오묘하면서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칭기즈칸으로 상징되는 몽골족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대에 고려는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하며, 불교에 기반해 혼란으로 점철된 삶을 추슬러야했다.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지점에 지눌이 존재한다. 지눌은 불교의 근본정신을 줄기차게 외치며 삶의 고통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참마음의 본체에는 두 가지 작용이 있다. 하나는 본래 그러한 마음의 근본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인연에 따르는 응용 작용이다. 예를 들면 구리거울과 같다. 구리거울의 바탕은 우리의 본래 그러한 마음이고, 구리거울이 밝게 빛나는 것은 본래 마음의 작용이며, 밝음으로 인해 개개의 대상이 비치는 것은 인연을 따르는 응용에 해당한다.

 

 이를 다시 마음에 가져와 비유해보자. 마음이 항상 고요한 것은 본래의 마음이고, 마음이 항상 아는 것은 마음 자체의 작용이며, 그 앎이 말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다른 사물과의 인연에 따라 응용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마음의 이 세 측면을 이해하고 사는가?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늘 쫓기고, 그것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던 건 아닌가.

 

 지눌이 말하는 돈오는 우리말로 단박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단박에 깨달아야 할까. 그 깨달음의 상태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흔히 현실에서 해매는 경우가 많다. 망상에 사로잡혀 자기 본성이, 자기의 슬기로움이 참된 부처인 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늘 자기 본성과 마음은 제쳐두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맨다. 헛되고 헛되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선지식(善知識)에 들어가는 길을 지시하는 한 줄기 빛을 따라 자기 본성을 깨우친다. 이때 본성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지성이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부처와 다름없다. 이런 사실을 깨우치는 작업이 바로 돈오다.

 

 돈오는 허망한 꿈과 같은 미혹 때문에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참마음, 참 자아를 흘연히 발견함을 의미한다. 미망에서 깨달음으로 변화,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 즉석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돈오라고 부른다. 갑작스런 깨침 때문에 돈오는 서서히 진행되는 점진적 과정이 아니라 갑자기 발생하는 하나의 정신적 혁명과 같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습기(習氣). 습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양태의 허깨비와 같은 것들이다. 현실을 사는 동안 수시로 끼어 달라붙은 때다. 습기는 하루아침에 벗기기 힘들다. 지속적인 수련과 수양을 통해 제거해나가야 한다. 비유해 보자. 저 산에 금이 가득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저 산의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 금을 캐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마음을 깨달은 이후에 닦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여기에서 점수의 문제가 고려된다.

 

 점수는 깨달음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 산에 금이 가득 묻혀 있음을 아는 것처럼 마음이 슬기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깨달음이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닦는단 말인가! 깨달음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닦아나가는 단련이 진정한 점수다. 깨달음이 없는 점수는 일시적 점수지, 영원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행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요청받고 있나? 내 마음은 어떤가? 먼저 나를 돌아보며 나의 슬기를 깨우쳐라. 깨달음이 없는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 앞에 돈오점수의 세계가 열려 있다. 문득 나를 깨지고 서서히 닦아나가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내가 나를 깨닫고, 내가 나를 닦아 나를 부처로 승화하라. 해답은 내 마음의 근저에 있다.

 

 신창호 /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퇴근길 인문학 수업(백상경제연구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