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순례자들

송담(松潭) 2018. 1. 22. 07:29

 

순례자들

 

 

 

 

 

 티벳이 하나의 그리움으로 마음속에 뿌리내린 계기는 오체투지(五體投地)때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왜 그것을 읽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잡지의 뒷부분에 실린 흑백 사진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 사진 속에는 광활한 티벳의 고원과 이를 배경으로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일어선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너무나 초라하고 지쳐 보였다. 하지만 흐릿한 모습이나마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을 숭고심원’, 혹이해등의 단어로 묘사할 수 있으나, 당시의 나는 그것을 단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그 복잡한 심정은 단어로 재단되지 않은 채 내 작은 마음 어딘가에 뿌리를 내렸다.

 

 뿌리는 이내 줄기를 밀어올리고 잎을 내고 그늘을 드리웠다. 오체투지에 대한 생각은 내 마음을 채워갔다. 오체투지란 불교의 예법으로 신체의 다섯 부분인 두 팔꿈치와 두 무릎 그리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행위다. 오체투지의 의미는 단순히 기복을 위해 초월적 신에게 바치는 고행을 넘어 선다. 그것은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 교만을 버리고 자아를 내려놓고자 함을 뜻한다.

 

 티벳인들에게 오체투지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일생에 한 번 수도 라싸까지의 오체투지 순례를 계획하고 실행해왔다.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오체투지를 하면서 수백 킬로미터의 목숨을 건 여정을 감내하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얼마나 불쌍한가. 이것은 종교가 어떻게 개인의 신체를 통제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고, 왜 종교가 인류의 아편이며, 그렇기에 왜 근현대 교육이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라고. 맞는 말이다. 폭력적인 종교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 근현대 역사의 가장 큰 성과임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저 광활한 히말라야의 설원 위를 오체투지로 건너고 있는 티벳인들을 향해 너희는 종교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고 있다고 쉽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을 보라. 너덜너덜해진 산발 밑창과 흙먼지에 더럽혀진 머리카락과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과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눈동자를. 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 내면의 광활함을 믿게 되었다. 가난하고 초라한 행색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언가의 광활함이 물리적인 한계를 너머 저 신체 안쪽 어딘가에 우주처럼 펼쳐져 있다는 진실을 나는 믿게 되었다.

 

 군장을 메고 사십 킬로미터의 야간 행군을 할 때면 나는 오체투지를 생각하곤 했다. 먼 길을 간다는 것 외에는 무엇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앞에 선 전우의 발뒤꿈치뿐이었지만, 그 지독하게 어둡고 피로한 시간이면 나는 순례의 길을 떠나는 한 명의 티벳인을 상상했다.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거운 발걸음을 반사적으로 옮기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아본다. 바람소리, 멀리 히말라야와 끝없이 펼쳐진 설원, 성스러운 산 카일라스 그리고 바람에 퍼덕이는 타르초, 그 깊고 장엄한 고독 속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타르초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눈을 감고 걷다보면 조금은 알 것만 같다, 그가 본 것이 외부세계의 경치와 대자연이 아니었음을. 그가 본 것은 자신의 내면이었으리라. 육체의 한계와 인간적인 고통 속에서 한 걸음을 간신히 내딛는 사람에게 외부의 세계는 빛을 잃고 내면의 빛은 밝아오는 법이니까. 그래서 그는 눈이 없어도 볼 것이고, 길이 없어도 걸을 것이다. 우주는 그의 내면에서 열린다.

 

  채사장 /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