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의 인지 심리학자인 대니얼 사이먼스 교수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여러분의 관찰력을 테스트할 거예요. 영상을 잘 보고, 공이 몇 번 전달되었는지 횟수를 적어 내세요.”
사이먼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에게 관찰력 테스트라고 말하고 25초짜리 영상을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흰색과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학생 여섯 명이 둥글게 모여 서서 농구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실험 대상자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농구공을 쳐다보았다. 농구공이 움직일 때마다 실험 대상자들의 눈도 따라 움직였다.
실험이 끝난 후, 사이먼스 교수가 물었다.
“고릴라를 본 사람이 있나요?”
실험 대상자들의 무려 50퍼센트가 이렇게 대답했다.
“고릴라 같은 건 없었는데요.”
사이먼스 교수는 영상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그런데 영상을 다시 보니,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학생들 가운데로 걸어 들어와서는, 두 손으로 가슴을 치고 어슬렁거리며 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영상을 보았지만, 실험 대상들의 50퍼센트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공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이 몇 번 전달되었는지 횟수를 세느라 공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고릴라가 두 손으로 가슴을 치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인지 구조는 불완전하며, 얼마든지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뻔히 고릴라가 나왔는데도, 공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1941~)는 이러한 인지과학 연구를 바탕으로 언어가 어떻게 인간의 생각을 형성하는지 연구한 학자이다.
프레임(frame)은 ‘기본 틀, 뼈대’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생각의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생각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프레임은 아이디어나 개념을 구조화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하며,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프레임을 잘 사용하고 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신이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프레임은 일상에서 쓰는 말에도 녹아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여자가 인터넷 카페에서 가짜 상품을 명품이라고 속여 팔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하자,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은 그녀를 ‘사기꾼’이라고 하고, 어떤 기자는 신문에서 ‘용의자’라고 표현한다.
사기꾼이라고 하면 이미 ‘사기’라는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된다. 반면 용의자라고 하면 범행을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사람이다. 두 말은 의미가 뚜렷하게 다르다. 그녀를 사기꾼이라고 하는지, 용의자라고 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인식도 달라진다. 이처럼 프레임은 말과 은유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흔히 인간은 이성을 가진 합리적인 존재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나 언론, 또는 권의를 가진 사람이나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모두 한목소리로 말하면, 잘못된 프레임에 넘어가기도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제 모습이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부자들의 편에 서서 상속세를 줄이자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상속세를 ‘죽음세’라고 표현했다. 상속세는 죽은 다음에 재산을 물려줄 때 붙는 세금으로 당연히 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세’라고 하면, 왠지 ‘죽어서까지 세금을 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상속세를 줄이는 것은 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이다(가난한 이는 물려줄 재산이 없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가난하면서도 ‘죽음세’라는 말의 프레임에 갇혀서 상속세를 줄이자는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난한 자신에게 불리한 정책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의 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존 프레임을 바꾸지 않고 지키려는 속성이 있다. 이때 그 프레임이 틀렸다며 사실이나 진실을 나열해 봤자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할수록 자꾸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처럼, 오히려 그 프레임을 강하게 만드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결국 프레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담은 프레임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더 많은 문제와 영역을 우리의 가치로 해석하고, 도덕적인 세계관 안에 녹여 내야 하다. 그리고 그 프레임을 행동과 목소리를 통해 반복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프레임이 바뀌고 인식이 변할 수 있다. 조지 레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프레임을 새로 조직하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우선 다르게 말해야 한다. "
< 프레임과 전교회장 선거 >
얼마 전 신도시 어느 중학교에서는 전교 학생회장을 뽑는 선거를 치렀다. 2학년인 한 후보는 ‘보통 학생들의 학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공부를 별로 못하거나 공부가 아닌 다른 꿈을 가진 학생들도 존중받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했다.(그런데 사실 이 후보는 아이들을 차별하고 험담도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1학년 학생들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1학년 학생들은 호응이 높았다. 학생을 공부로 차별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일이다. ‘보통 학생들의 학교’라는 프레임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다른 후보가 ‘보통 학생들의 학교’라는 프레임을 공격해서는 효과가 별로 없다. 비슷한 프레임을 내세우면 더욱 안 된다. 프레임은 일단 굳어지면 잘 바꾸지 않는다. 이럴 때는 다른 프레임을 내세우는 편이 낫다.
다른 후보는 ‘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하교’라는 구호를 내 걸었다. 이 학교는 탈의실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남녀 합반인 1학년 여학생들은 화장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곤 했다. 이 후보는 ‘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하교’의 세부 공약으로 탈의실 설치를 약속했다. 또 이 학교는 축제 때 합창과 시화전을 여는게 고작이었는데, 장기자랑, 댄스 경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제 학생들은 이 팀의 세부 공약에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선거를 지배하는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결국 이 후보가 선거에서 이겨 당선되었다.
기존 프레임을 이기려면 새롭고 더 강력한 프레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프레임에 따른 행동과 목소리를 계속 반복해야 비로소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
최진기 / ‘교실밖 인문학’중에서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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